내게는 종종 전생을 묻는 분들이 찾아온다. “제 전생은 무엇이었을까요?” 전생을 보는 것은 영계의 큰 범죄다. 전생을 본만큼 업보를 받기 마련이다. 전생을 볼 줄 안다고 함부로 얘기했다가는 화를 당하기 일쑤다. 그러나 살다보면 뜻하지 않게 자신의 전생을 자연스럽게 알게 될 때가 있다.
조선 말 무신이었던 윤웅렬 대감. 대표적인 개화파로 윤치호의 부친이었던 그는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전남 완도로 유배되고 만다. 3년 째 귀양살이를 하던 어느 날, 자신의 집 노비가 마을에 명두(마마를 앓다 죽은 여자 아이의 귀신) 무당이 앞날을 기가 막히게 잘 맞춘다고 귀띔했다. 귀양살이에 지쳐있던 윤 대감은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무당을 찾아갔다.
어찌된 일이지 소녀무당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렸다. 윤 대감은 무당을 시험코자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고 묻자 무당은 “한양에서 온 고관 나리 아닙니까?”라고 대답했다. 무당은 윤 대감에게 귀양살이는 보름 후에 끝나며 아들 윤치호는 미국에서 만난 청나라 여인과 약혼해 중국 상해에서 결혼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윤 대감은 거짓말이라도 덩실덩실 춤을 추고 싶었다. 내친 김에 그는 전생까지 물었다. 그러자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소녀무당은 앙칼진 목소리로 “대감은 전생에 승려였습니다”라면서 "법호는 해파(海波)요, 승명은 여순(與淳)이었다"고 구체적으로 알려줬다. 윤 대감이 전생에 함경도 안변의 석왕사(釋王寺)란 절에서 열심히 정진한 공덕으로 다음 생엔 중국에서 태어나 일품 대신으로 큰 공로를 세우며 부귀했고 금생은 조선에서 태어나 장차 군부대신이 될 것이며 5복을 구족하며 부귀하겠다고 예언했다.
귀양살이 온 대신에겐 과분한 전생이었다. 소녀는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전생에 함께 출가한 형은 지지리도 복이 없군요.” 형은 스님 노릇을 잘못해 시주금을 횡령하고 부처님의 보물을 훔친 죄로 지옥에 떨어졌다가 겨우 사람으로 환생했지만 가난한 과보를 받아 끔찍하게 고생하고 있다고 했다. “형을 찾을 거면 강원도 통천으로 가십시오. 거기서 ‘새술막이’란 술집을 하고 있습니다. 이름은 이경운이며 두 손이 모두 조막손이랍니다.”
보름 후 윤 대감은 유배지에서 석방됐다. 소녀의 예언이 적중한 것이었다. 그 후 윤 대감은 소녀의 예언대로 군부대신에 오른 뒤, 1903년 아들 윤치호와 호위병을 끌고 함경도 석왕사를 찾아갔다. “혹시 해파 여순이란 승려를 아는가?” 하지만 스님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백 년 전 스님의 행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윤 대감은 소녀 무당의 말을 믿고 함경도까지 호위병을 끌고 온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는 모든 것을 잊고 사냥이나 할 요량으로 뒷산에 올랐다가 암자 입구에서 잠시 숨을 돌렸다. 그때였다. 암자 앞에 줄지어 서 있는 부도 중에 ‘해파당 여순(海波堂 與淳)’이라 쓴 부도가 있는 게 아닌가.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자신의 전생을 여기서 만날 줄이야. 그는 아들과 수행원을 불러 부도 앞에 절하게 한 뒤 석왕사 스님들에게 완도의 소녀 무당 얘기를 들려줬다고 한다. 윤 대감은 그 즉시 하인을 강원도 통천으로 보내 전생의 형님을 수소문했다. 과연 소녀 무당의 말대로 ‘새술막이’란 술집을 하는 ‘이경운’이란 자를 만날 수 있다. 그는 양손이 모두 조막손으로 지지리도 가난했다.
하인은 늙은 이경운을 윤 대감 집으로 데려와 절하게 했다. 그러자 윤 대감은 절을 못하게 한 뒤 이경운에게 전생의 인연을 얘기하고는 “전생의 형님에게 돈 백 냥과 옷감 열 필을 드립니다. 이 돈으로 노후를 편히 지내시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늙은 이경운을 배려해 군수에게 환전표를 떼어주고 운반까지 도왔다고 한다. 이로써 완도 소녀 무당이 말한 자신의 전생까지 확인한 윤 대감은 함경도 석왕사에 대중을 불러 대중공양을 올리고 전생에 공부한 도량에 500냥을 시주했다. 이는 안변 '석왕사지'에 남아있는 글이다.
윤웅렬 대감처럼 자신의 전생을 알기란 쉽지 않다. 아마도 그가 전생에 큰 복을 쌓았기에 가능했던 일인 듯싶다. 안타깝게도 그는 대표적인 친일파로 남작 지위까지 수여받았다. 지금도 부암동에 가면 윤웅렬 대감의 별장이 있다. 서울시 민속 문화재로 지정된 그의 별장엔 윤대감의 전생과 현생의 비밀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