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우도 장가를 간 적이 있을까? '삼국지연의'에는 관우의 부인 얘기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마치 관우가 오로지 유비에게 충성하느라 수도승처럼 살아왔다는 것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관우가 관평을 양자로 받아들이는 장면에서 관우는 이렇게 말하기까지 한다.
"전장을 떠돌아다니다 보니 미처 장가들 틈이 없었습니다."
과연 그랬을까? 평균수명이 마흔 전후였던 시절에 관우처럼 혈기 왕성한 장수가 나이 마흔이 되도록 장가를 못 들었을 리가 없다. 신분이 불안해 정식 장가는 못 들었다 해도 야합을 하거나 여자를 강제로 취하기는 했을 것이다. 장비가 나물 캐러 나온 하후연의 어린 조카를 납치해 부인을 삼았던 것으로 보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관우는 탁현 시절부터 처자가 있었을 것이다. 힘이 지배하던 세상에서 탁현을 지배하던 조폭집단의 '넘버 투'였으니 여자가 없었을 리가 없다. 아마도 유비를 좇아 이리저리 떠돌던 과정에서 가족을 잃었거나 버렸을 것이다.
관우 역시 힘으로 남의 여자를 빼앗는 일에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유비가 조조와 함께 하비성에서 여포를 포위했을 때의 일이었다. 하루는 관우가 조조를 찾아왔다. 의아해 하는 조조에게 관우는 여포의 부장 중에 진의록이라는 자가 있는데 성이 함락되면 그의 처를 자기에게 달라고 부탁했다. 조조는 흔쾌히 허락했다. 그런데 성의 함락이 임박하자 관우가 몇 번 더 찾아와 다짐을 받았다.
조조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무엇이 저 관우라는 사내를 이토록 애태우게 했을까. 여포의 항복을 받은 후 조조는 장난삼아 먼저 진의록의 처를 데려다 놓고 보았다. 대단한 미인이었다. 조조는 그녀를 취해 자신의 첩으로 삼았다. 후일 조조의 비빈이 된 두부인(杜夫人)이 바로 그녀였다.
조조는 두부인을 꽤나 사랑했었던 것 같다. 두씨가 첩이 되었을 때 이미 진랑이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조조가 진랑을 아들처럼 궁에서 키우며 심히 예뻐했다. 매번 손님들을 맞을 때마다 무릎에 안치고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세상에 나같이 의붓자식을 친아들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까?"
연모했던 여인을 빼앗긴 관우는 깊은 원한을 품었다. 후일 관우가 조조의 후대에도 불구하고 끝내 그에게 심복하지 않은 까닭이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세상에 사랑하는 여인을 빼앗아간 사람의 밑에서 일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미화된 영웅] 관우, 평범했으나 신이 된 사나이
관우(?~219)는 젊은 시절 친구의 원수를 갚아준다는 명목으로 고향의 세력가 한 사람을 살해했다. 관우의 고향인 하동군 해현에는 큰 소금 호수가 있었는데 매우 염도가 높아서 소금 산지로 유명했다. 내륙 지방인 산서성에 위치한 하동군은 소금이 귀했으므로 해현의 소금산업은 매우 큰 이권이었다. 관우는 이권다툼의 와중에서 어떤 사람의 청탁을 받고 한밤중에 담을 넘어 들어가 상대방의 실력자를 살해해 버린 것이다. 전형적인 협객의 행태였다.
이처럼 협객출신의 살인자가 어찌하여 중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영웅의 한사람이 되고 급기야는 신의 반열까지 오르게 되었을까? 관우는 사후에 '관공(關公)'으로 높여 불리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관왕' '관제'에 이어 '관성제군(關聖帝君)'으로 격상됐다. 심지어 관우를 모시는 민간신앙이 종교화해 *관성교(關聖敎)가 되었고, 그를 섬기기 위한 관제묘가 전 세계에 설치돼 있다. 중국 역사에서 인간으로서 신의 반열에 오른 사람은 공자와 관우 딱 두 사람뿐이다. 관우가 영웅이 되고 신격화하게 된 것은 그가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관우는 육손의 표현 그대로 일생에 큰 성공을 이루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관우가 한때 *'만인지적(萬人之敵)의 장수'라 불릴 만큼 무용이 뛰어났던 것은 사실이다. 관우는 백마의 싸움에서 만명의 군중을 뚫고 돌진해 원소의 상장 안양의 목을 단칼에 베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적 무용 차원의 일이었다. 관우는 군사지휘관으로서 능력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처음으로 독자적으로 작전한 하비성 수성전에서 그는 성을 지켜내지 못했다. 또 조인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출전했던 심구에서의 전투도 패전으로 끝났다. 형주 쟁탈전에서도 여몽·감녕 등 상대방을 압도하지 못했다. 관우가 유일하게 크게 성공을 거둔 작전은 양번을 포위한 후 우금의 칠군을 몰살시킨 일이었다. 그것도 실은 작전의 성공이었다기보다는 한수의 범람이라는 천재지변의 도움 덕이었다.
한번의 성공으로 한없이 우쭐해진 관우는 간적 조조를 도모해 중원을 되찾고 한실을 회복하겠다고 거창한 구호를 내걸었다. 능력 밖의 일인 줄 몰랐다. 관우의 교만한 성품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관우는 평소의 사인계급을 멸시했다. 난세에 수많은 사족 출신의 인사들은 비루한 목숨하나 지키고자 혹은 가족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변절과 배신을 일삼는 경우가 많았다. 의리를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협객 출신의 관우로서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행태였다. 관우는 늘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춘추'를 끼고 다니며 사인들의 의리 없음을 매도했다. 관우는 군량과 병력의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후방의 미방과 부사인을 협박했다. 대공을 이룬 후에 손을 봐주고야 말겠다고. 사실상 배반을 유도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손권을 모욕한 일이었다. 협력을 구걸해도 부족한 상황에서 그는 손권에게 동맹파기의 명분을 제공해 주었다.
관우는 충의의 화신이요, 무인들의 신이 될 정도로 인격적으로나 실력적으로 뛰어났던 인물은 아니었다. 그저 흔한 협객 출신의 무장에 불과했다. 육십이 가까운 나이에도 마초와 비무를 하겠다거나 황충과 같은 병졸 출신과 같은 반열에 설 수 없다고 심술을 부렸던 것을 보면 미숙한 면까지 있었다.
[거짓말 벗겨보기] 관우에게 오관육참 사건은 없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가 조조를 떠나 유비에게 돌아가는 과정에서 다섯 개의 관문을 통과하면서 길을 막는 여섯 명의 장수를 목 베었다고 한다. 이른바 ‘오관육참장 설화'이다.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관우는 조조의 사후적 허락이 있었기에 유비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 관우가 조정에 의해 임명된 장수와 지방관들을 마구 죽이고 다녔다면 조조가 이를 내버려 두었을 리가 없다.
[풀이]
*관성교=임진왜란 이후 조선에 들어온 관우 숭배를 바탕으로 1920년 창립된 무속 계통의 종교. *만인지적=만명에 필적할 만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