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미국 뉴저지에서 올린 구명시식이다. 지금까지 그 어떤 칼럼에도 밝히지 않았던 얘기다. 먼 나라 미국에서 올린 구명시식에는 춤과 노래가 없었다. 마땅히 춤을 추거나 노래할 수 있는 분도 찾을 수 없었다. 심고 끝에 내가 가진 영능력으로만 구명시식을 올리기로 결심했다.
어느 날, 환갑을 바라보는 여교수가 찾아왔다. 그녀는 저명한 교수였던 아버지를 위한 구명시식을 올려달라고 부탁했다. 부친은 학계의 거성이었다. 나도 그 분의 이름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아버진 전 세계에 소문난 유물론자셨죠. 항상 죽으면 그만이라고 하셨어요. 과연 구명시식을 올리면 우리 아버지 영가가 오실까요? 아버지가 오신다는 건 생전 당신의 말씀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는 일일텐데요.”
그녀의 부친은 철저한 유물론자였다. 때문에 종교도 철저히 배척했다. 영혼불멸 사상을 앞세운 종교는 사람들을 기만한다고 주장했다. “종교는 아편이라고 강조하셨죠. 사람이 착하게 살고 살아있는 순간을 충실히 즐기면 된다고 하셨어요. 영혼을 들먹이는 종교나 사상은 세상을 시끄럽게 한다고 믿으셨죠.”
영혼이 없다고 믿는 유물론자인 부친 영가를 초혼하는 구명시식. 이는 다시 말해 영혼을 초혼하는 나의 영능력을 시험하는 자리였다. 부친 영가가 나타나면 부친이 틀렸다는 것이요, 부친 영가가 나타나지 않으면 내가 틀렸다는 것이니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구명시식이었다.
구명시식이 시작되자 놀랍게도 부친영가는 자연스럽게 나타나 딸에게 “담배 한 대 피우고 싶다”라며 말을 건넸다. 딸은 “그럴 줄 알고 미리 준비했어요”하면서 부친이 좋아했던 시가를 올렸다. “역시 우리 딸이다. 내가 좋아하는 술도 가져왔냐?” “그럼요.” 딸은 평소 즐겨 마시던 브랜드의 위스키를 올렸다.
부친은 한 가지를 더 찾았다. “담배·술…그 다음은 뭔 줄 알지?” 딸은 부친의 말에 제사상에 육포를 올려놨다. 아버지가 좋아하던 육포였다. 마침내 부친 영가는 매우 행복해하며 술과 담배·육포를 즐겼다. 영혼이 틀림없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한 셈이었다.
부친 영가는 호남 지역에선 아주 유명한 분이였다. 일제 강점기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대학의 교수가 됐다. 그는 평상시에도 한국어를 거의 쓰지 않았다고 한다. 딸은 그나마 어머니와 대화하기 위해 겨우겨우 한국말을 배웠다 한다.
부친을 닮아선지 딸도 굉장히 앞선 여성이었다. 논리적으로 쿨한 교수인 그녀는 구명시식에 부친이 나타나자 진심으로 기뻐했다. 아버지의 논리가 맞고 틀린 것을 떠나 유물론자인 부친 영가와의 재회 자체를 즐거워했다.
부친 영가는 자신이 주장했던 유물론의 실체를 공개했다. “나는 원래 영혼을 안 믿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유물론은 영혼의 존재를 빌미로 괜히 남을 피곤하게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사람이 죽으면 왜 영혼이 없겠냐?” 부친 영가는 딸이 치매에 걸린 어머니 걱정을 하자 “사람은 물 먹은 대로 오줌 싸게 되어 있다. 더 살게 내버려 둬라”고 말했다.
그는 영계로 돌아가기 전 내게 신신당부했다. “절대 내 구명시식을 올렸단 말은 하지 마십시오. 만약 내가 구명시식에 나타났다는 사실이 학계에 알려지면 내 이론이 뭐가 되겠습니까? 허허허.” 이제 세월이 25년 가까이 흘렀다. 대한민국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유물론자 학자의 사상까지 너그럽게 포용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기에 최초로 이 구명시식을 공개한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