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그를 궁핍한 선수로 만들었다. 대회에 나갈 때는 경비를 줄이기 위해 제일 싼 이코노미클래스 티켓을 구입해 혼자 비행기를 탔다. 숙소도 호텔 대신 '하우징'을 했다. 골프장 근처 빈방이 있는 가정집에서 무료로 잠을 자고 직접 음식을 해서 먹었다. 그는 이러한 궁핍한 생활 때문에 한때는 미국 골프 무대를 포기하고 한국에 돌아올 생각을 했다. 아니, 정말이었다. 2011년 말 국내로 복귀를 추진했지만 정작 KLPGA 투어 시드 선발전에서 고배를 들자 차라리 미국에 다시 남기로 했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진출 4시즌 만에 첫 우승을 달성한 이일희(25·볼빅)의 이야기다.
이일희는 27일(한국시간) 바하마 파라다이스 아일랜드의 오션클럽 골프장에서 열린 LPGA 투어 퓨어실크-바하마 클래식 마지막날 12개홀로 치러진 3라운드에서 버디만 5개를 낚아 합계 11언더파 126타로 우승했다. 최종 라운드에서 7타를 줄이며 맹추격한 아이린 조(29·미국·합계 9언더파)를 2타 차로 꺾었다.
폭우로 골프장이 잠겨 36홀 경기로 축소된 이 대회에서 이일희는 2010년 LPGA 투어 진출 이후 첫 우승이자 대회 초대 챔피언에 올랐다. 우승상금은 19만5000달러(약 2억1600만원). 이로써 올해 한국여자골프군단은 LPGA 투어에서 5승을 수확했다.
이번 대회는 기상악화로 파행운영됐지만 세계랭킹 1~10위까지의 선수가 모두 출전했다. 1, 2라운드에서 파45로 치러졌던 경기는 최종 라운드에서 다소 변동이 생겼다. 물에 잠겨 있던 18번홀(파5)에 물이 빠져 정상 플레이가 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18번 홀로 4번 홀(파3)을 대체해 마지막 라운드는 파47로 진행됐다. 폭우는 그쳤지만 강풍이 몰아쳤다.
이 모든 것이 이일희에게는 행운으로 다가왔다. 18번 홀은 2온을 해서 버디로 우승에 쐐기를 박는 최고의 승부홀이 됐고 강풍은 단타자인 다른 선수들을 괴롭혔지만 장타자인 이일희에게는 오히려 승부수를 띄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일희는 "너무 바랐던 우승이라 눈물이 난다"며 "마음 고생이 심했던 한국의 어머니에게 가장 먼저 전화드려야겠다"고 말했다. 1988년생 '세리 키즈' 이일희는 안정된 국내 투어무대를 박차고 2010년 '나홀로' 미국 무대로 뛰어들었다. 가족도, 매니지먼트사도 없었다.
그렇게 미국 LPGA 투어에 진출했지만 첫해인 2010년에는 상금 6만7000달러(약 7500만원)를 벌어 연간 1억원이 넘게 들어가는 투어 경비도 충당하기 어려웠다. 그 이듬해인 2011년(시즌 상금 5만3000달러·약 5900만원)에는 수입이 더 줄었다.
이일희는 국가대표 상비군을 거쳐 화려한 주니어시절을 보내고 2007년 KLPGA 투어에 데뷔해 매년 상금랭킹 20위권을 넘나들었다. 그런 그로서는 비참한 생활이었다.
이일희는 이번 대회에서는 자신의 장기샷인 파워 드라이브 샷을 앞세워 버디만 5개를 낚는 정교한 샷을 선보였다. 전문가들은 그의 스윙에 대해 '교과서적인 스윙'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이일희는 "선수로서 어느 순간 최악의 밑바닥까지 떨어졌지만 돈이 아닌 꿈을 생각했다. LPGA 투어 단 1승이라도 좋으니 우승하고 그만 두자는 각오로 투어에 임했다"고 눈물을 글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