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상대 골키퍼가 판단 실수를 한 건데, 나도 같은 골키퍼 입장에서 '지금 기분이 어떨까' 생가하면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더라고요.” 골키퍼 권정혁은 21일 제주 유나이티드와 원정경기에서 85m, 리그 사상 최장거리 골을 기록했다. 골문에서 살짝 앞으로 나와 찬 공이 한 번 그라운드에 튕긴 뒤 상대 골문으로 빨려 들어갔다. 제주 골키퍼 박준혁은 망연자실했다. 권정혁이 넣은 골은 리그 기록일 뿐 아니라 인천 구단 통산 400호골이었다. 권정혁은 “집에 왔는데 와이프가 장하다고 해주더라. 그제서야 좀 실감이 나고 기뻤다”고 말했다.
권정혁이 처음부터 골킥을 잘 찬 건 아니다. 그는 “사실 내가 학교 다닐 땐 골킥을 골키퍼가 아니라 스위퍼가 차는 경우가 많았다. 프로팀 와서 골킥을 제대로 배우기 시작했다”며 “골킥이 보기엔 쉬워 보여도 그렇지가 않다. 프로와서 4-5년 지나서야 제대로 골킥을 찰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골킥을 잘 차기 위해선 발목 힘과 허벅지 안쪽 근육이 강해야 한다. 요즘도 팀 훈련 외에 혼자서 한 시간씩 보강 훈련을 한다"고 설명했다.
‘골킥의 신’ 권정혁에겐 또 다른 필살기가 있다. 그는 골키퍼에겐 보기 드문 양발 잡이다. 그는 “상대가 붙을 때 내가 오른발로 다들 찰 거라 생각해서 오른쪽을 견제하는데, 왼쪽에 놓고 왼발로 차버리면 상대 입장에선 예측했던 것보다 거리가 5~10m까지 벌어진다. 나 역시도 시간을 1,2초는 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권정혁의 진기록 행진은 이게 다가 아니다. 그는 국내 골키퍼 최초이자 유일한 유럽 진출자다. 권정혁은 지난 2009년 핀란드의 '산타클로스 마을' 로바니에미시에 있는 ROPS구단으로 이적했다. ROPS는 세상에서 ‘가장 북쪽’ 클럽으로 알려진 곳이다. 권정혁은 “생각만큼 춥진 않았다”며 “핀란드는 선진국에 복지 국가 아닌가. 축구 외에도 배워 온 것이 많다. 지위고하를 떠나 정말 평등하게 사람을 대하더라”고 떠올렸다. 그는 또 “용병 쿼터가 따로 없어서 외국인 선수가 구단의 절반이었다. 다들 영어로 얘기해 의사소통에 큰 문제는 없었다”고 말했다. 유럽 진출이 꿈이었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영어를 공부해 왔다. 지금도 구단에서 '영어 하는 남자'로 통한다.
권정혁의 올해 나이는 36세. 그는 “나이가 들수록 더 축구에 집중하게 된다. 이젠 조금만 기량 떨어지면 ‘아웃’ 아닌가”면서도 “나보다 8살 많은 김병지 형도 잘 하고 계신데, 내가 나이 탓 하면 안된다”고 웃었다. 그는 "고등학교 때 인터뷰 한거 보니 '마흔 살까지 축구하고 싶다'고 했더라. 말 처럼 된다고, 그래서 지금까지 무사히 선수 생활을 해 온 거 같다. 앞으로 부상없이 마흔까지 선수생활 하는 게 목표”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