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연은 매우 담대하고 유능한 장수였다. 그러나 제갈량은 그를 멀리하고 중용하지 않았다. 개인적인 감정도 있었다. 위연은 돌다리도 두드려 보는 성격인 제갈량이 성에 차지 않았다. 곧바로 장안을 기습하자는 그의 의견이 무시되자 위연은 늘상 제갈량을 겁쟁이라 비난했다. 속 좁은 제갈량이 이를 좋아했을 리가 없다.
위연은 배짱이 두둑했다. 한중을 점령한 후 유비는 *아문장 위연에게 한중의 방어를 맡겼다. 한중은 형주에 못지않은 전략적 요충지였으므로 당연히 장비가 맡게 될 것이라는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깬 결과였다. 유비는 여러 신하들을 모아 큰 잔치를 벌이고는 위연에게 물었다.
“지금 경에게 중책을 맡기고자 한다. 경은 그 자리를 맡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위연이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조조가 천하의 병력을 다 동원해 쳐들어온다면 저는 대왕을 위해 이를 막아내겠습니다. 일개 편장이 십만 명 정도의 병력을 거느리고 온다면 저는 대왕을 위해 저들을 삼켜 버리겠습니다.”
유비가 위연의 대담함을 장하게 여겨 크게 칭찬했다. 위연은 뒤늦게 유비의 진영에 합류했으나 서촉정벌전에 종군하며 뛰어난 용맹과 담력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위연은 선봉장이 되어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개 부곡병 출신인 그가 익주의 *인후지지라 할 수 있는 한중의 방위를 담당하는 번장이 되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파격적인 일이었다. 사람을 볼 줄 아는 유비의 탁월한 안목 덕분이었다. 유비의 판단에 장비는 실수가 많아 독자적으로 한중을 책임지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위연은 용맹하고 대담할 뿐 아니라 나름대로 전략적 식견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위연을 위험한 인물로 보았다. 제갈량은 마속·장완·양의처럼 제대로 교육을 받은 사대부 출신을 중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여기서 유비와 제갈량의 사람 쓰는 방식의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유비는 탁상물림의 사대부 출신보다는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실무형 인재를 선호했다. 위연·마충 등이 다 그런 부류였다. 대부분 유비가 발탁한 인사들의 실적이 더 나았다.
위연은 북벌전쟁이 시작된 후에도 무도군에서 곽회와 비요의 대군을 격파하고, 노성에서 사마의의 군대에게 큰 승리를 거두는 등 혁혁한 공훈을 세웠다. 제갈량이 그를 미워하고 꺼리면서도 내치지 못한 이유였다. 뛰어난 무장이 없었던 촉나라는 그의 무공에 의지하는 바가 컸다. 그러나 제갈량은 자신의 비서실장 격인 장사 양의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위연을 견제하고 감시했다.
제갈량이 죽자 위연은 당연히 자신이 군대의 지휘권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가장 선임이었기 때문이다. 위연은 계속해서 북벌전쟁을 수행할 작정이었다. 바야흐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을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갈량은 죽기 전 자신의 측근들인 양의·비의·강유 등에게 군권을 넘겼다. 이에 격렬하게 반발하던 위연은 결국 제갈량의 참모들에 의해 역적으로 몰려 제거되고 만다. 참으로 억울한 죽음이었다. 제갈량은 배포가 두둑한 위연이 북벌에 성공을 거두게 되면 유씨의 촉한 정권이 위태해질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일까.
위연을 중용한 `촉주` 유비의 초상화. [일간DB]
[영웅의 이면] 위연의 ‘자오곡진군론’
제갈량이 북벌에 앞서 전략회의를 열었다. 위연(?~A.D 234년)이 오래 동안 한중 방위를 책임져 온 경험을 바탕으로 진령 사이로 난 험한 계곡인 자오곡을 통해 바로 장안성을 기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저 유명한 '자오곡출병론'이다. 제갈량은 이 계획이 너무 위험하다고 여겨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먼저 서량을 점령해 후방의 위험을 제거한 후 단계적으로 동쪽을 향해 진격하는 전략을 수립했다. 이것은 소위 '기산출병론'이다. 이와 관련하여 누구의 의견이 옳았는지에 대한 논란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지금의 시점에서 어느 작전이 더 효과적이고 성공가능성이 높았느냐 논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때의 여러 가지 조건과 내부 사정들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만 각자 처한 입장과 생각이 달랐기에 각각 주장이 달랐을 뿐이다. 위연이 제시한 안은 모험적이긴 하지만 충분히 성공 가능성이 있었다.
북벌의 성패는 얼마나 빨리 관중을 점령해 근거지로 삼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한고조의 사례를 보아도 그가 일거에 관중을 장악했기에 서초패왕 항우와 기나긴 지구전을 벌일 수 있었고 결국 최종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계획대로 장안성을 빨리 함락시키지 못한다면 자오곡의 험한 길을 따라 관중에 들어간 촉군은 후방이 차단되어 독안에 든 쥐가 될 위험성이 높았다. 그러나 위연은 믿져봐야 본전이었다. 밑바닥부터 오로지 전공에 의해 출세한 그로서는 모험에 성공해 관중을 점령하고 중원을 회복한다면 이보다 더 큰 공이 있을 수 없었다. 실패해 봤자 목숨 하나 버리면 그만이었다.
제갈량은 신중한 성격이기도 했지만 위연처럼 일거에 모든 것을 걸고 모험을 할 수 없었다. 그는 한실중흥의 막중한 책임이 그의 두 어깨에 달려있다는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의 실패는 곧 400년 한나라 황실의 패망을 의미했다. 제갈량은 다소 성공가능성은 낮더라도 위험을 피할 수 있는 만전의 대책을 원했다. 그는 충분한 준비를 갖추었으므로 잘만 한다면 정면 승부로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보았다.
결과론적으로 말하자면 위연의 자오곡출병론은 촉한이 중원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었다. 국력의 차이가 명백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너무 아쉬워할 것은 없다. 설사 제갈량이 북벌에 성공했다고 해봐야 역사에 별 차이는 없었을 테니까. 다 망한 나라를 다시 살려 놓아보아야 그것이 일반 민중의 시각에서 볼 때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거짓말 벗겨보기] 위연이 장사태수 한현 밑에 있었다고?
“저놈의 목을 당장 쳐라.”
'삼국지연의'를 보면 제갈량은 아무 이유도 없이 장사태수 한현을 죽이고 항복해 온 위연을 참수하려고 한다. 뒤통수 골상이 반골이라나. 말도 안 된다. 이런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로 제갈량이 위연을 죽이려고 했다고 삼국지연의의 저자들이 기술한 까닭은 무엇일까? 위연을 처음부터 나쁜 놈으로 몰아 놓아야 그를 중용하지 않은 제갈량의 결점이 감추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유비는 위연을 잘 활용했고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제갈량이 그를 활용하지 못했을 뿐이다. 위연이 황충과 함께 장사태수 한현의 밑에 있었다는 '삼국지연의'의 내용조차도 사실이 아니다.
풀이
*아문장=경호대장격인 직위. *인후지지(咽喉之地)=목구멍과 같은 땅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를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