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문화권인 한국·중국·일본·대만 등의 나라에는 연장자를 우대하는 관습이 있다. 지하철·버스 같은 대중교통은 물론이고 식당이나 자리가 정해지지 않은 공연장에서도 연장자에게는 가장 좋은 자리, 가장 앞줄을 내어드리는 것이 상례다.
연장자들이 앉는 가장 좋은 자리, 우리는 이런 자리를 '상석(上席)'이라고 한다. 계급이 높거나 나이가 많은 분들은 으레 상석으로 안내된다. 그런데 간혹 상석에 앉는 상황이 애매해질 때가 있다.
네 명 정도가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A는 과거엔 분명 고위관리였지만 지금은 퇴임해 백수이고, B는 현직 고위관리이고, C는 백수이지만 나이가 제일 많고, D는 관직은 없지만 그날의 모임을 주선한 사람으로 밥값을 낼 예정이라고 치자.
이런 경우라면 과연 누가 상석에 앉아야할까. 높은 관직에 있는 B일까, 과거에 높은 자리였던 A일까, 나이가 제일 많은 C일까, 모임을 주선한 D일까. 살면서 정말 이런 경우를 많이 만나게 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상석에 앉을 사람은 나이가 제일 많은 C이다.
만약 외국이라면 모임을 주선한 D가 될 지도 모른다. 또 공적인 자리라면 관직이 높은 B일수도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친목을 도모하는 식사 모임이라면 당연히 연장자가 상석에 앉아야 한다. 이는 한국이 유교문화권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예의범절을 배웠다. 항상 남에게 존댓말을 하고, 아랫사람에게 인사를 잘하고, 상석엔 반드시 어른을 모시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연장자를 대접하는 기본적인 예의라 하셨다.
그런데 얼마 전 한 친목모임에서 내가 아는 상석의 법칙이 깨진 일이 있었다. 그 날의 모임은 멤버가 조금 색달랐다. A는 현직 관리였고, B는 전직 고위관리였지만 퇴임한 여성이었다. C는 나이가 가장 많은 분이였고, D는 모임에 초대된 나로 두 번째로 나이가 많았다.
나는 당연히 상석에 나이가 가장 많은 C를 모실 생각이었다. 그런데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여성 관리였던 B가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상석에 앉았다. 순간 모두들 당황한 기색이었다. C를 상석에 모시려던 나도 당황했고,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앉으려고 했던 C도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러나 B는 이 상황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왜 다들 서 계세요? 시장하지 않으세요?” 그 말에 나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C도 D도 B보다도 나이가 많고 또 A는 B보다도 높은 직함을 갖고 있는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 B가 상석에 앉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
자리의 특성상 나는 화를 참고 묵묵히 식사를 했다. 이는 나이 많은 사람들의 권위의식이 아니다. 교육계 고위관리까지 한 B가 가장 기본적인 상석의 법칙조차 모른다는 게 답답했다. 괜히 기분 좋은 식사 자리에서 B에게 한 마디 하면 모기 잡을 때 칼을 빼든 것 같아 참고 넘어갔지만 그날 이후로 B에 대한 생각이 180도 바뀌고 말았다.
나는 지인에게 그 날의 일을 얘기하면서 “유학파라 그런 건가요?”라고 했더니 지인은 큰 소리로 웃으면서 “그건 아닐 겁니다. 아마도 약간 공주병 증상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었을까요?”라고 답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상석은 상석이다. 여자건 남자건 나이든 분들을 우선해야 하는 건 당연하다. 고향에서 성공했다고 힘주지 말고, 동네 어른들께 인사 잘하고 상석엔 꼭 어른들을 모셔 마음 편하게 해드리길 바란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