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역사 인식을 보여주는 중국 지도 `중국강역변천여지도발전`. 화흠이 삼공으로 있던 위나라가 한반도 허리를 지배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화흠은 고매한 인격자인가? 겉만 그럴 듯하게 꾸미고 이름 팔기를 좋아하는 위선자인가? 여러 사서들에 나타난 화흠의 모습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사료에 따라 이것이 과연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인가 의심될 정도로 평가가 엇갈리기 때문이다.
먼저 '삼국지'의 가장 기본이 되는 사서인 진수의 '삼국지'에 나온 그의 모습을 살펴보자. 화흠은 청빈한 삶을 살았으며 늘 행실이 신중했다. 윗사람을 충성으로 섬겼고 아랫사람들에게는 은덕을 베풀었다. 윗사람에게 간언해야 할 일이 있으면 *풍간을 통해 은유적으로 표현했을 뿐 직설적으로 논박하지 않았다. 평소에 청빈해 재물과 봉록을 하사받으면 다 친척과 친지들에게 나누어주고 집에는 한가마니의 곡식도 쌓아놓지 않았다.
한번은 조비가 포로로 잡은 노비들을 대신들에게 하사했는데, 화흠만은 이들을 다 풀어주고 시집, 장가까지 보내 주었다. 화흠의 훌륭한 행실에 관한 사례는 이외에도 무수히 많다. 이 기록대로라면 그는 참으로 훌륭한 도덕군자였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조만전'과 '후한서' 복황후전에는 화흠의 전혀 다른 모습이 기술되어 있다. 건안19년(214년) 여름 조조는 케케묵은 사안을 끄집어내어 복황후를 폐위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복황후를 폐출하고 살해한 일에 앞장을 선 사람이 청빈한 군자로 이름이 높던 화흠이었다. 화흠은 황제가 보는 앞에서 복황후의 머리채를 잡고 궁밖으로 끌어내었다고 한다. 화흠은 복황후와 그녀의 집안사람들을 다 멸족했다. 이 일은 조조가 헌제의 저항의지를 꺾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
고결한 인격자에 덕망 있는 학자와 황후의 머리채를 질질 끌고 나와 살해해 버리는 패륜아, 마치 지킬박사와 하이드와 같은 모습이 아닌가. 너무 놀라운 변신이어서 '조만전'과 '후한서'에 나오는 이 기록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화흠에 관한 상반된 기록들은 다 사실일 것이다.
'삼국지'나 '후한서'가 근거도 없이 이런 기록을 남겼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모순된 기록들은 화흠의 바른 태도와 행실은 다 본심에서 우러나왔다기보다는 명성을 탐해 스스로를 꾸미고 홍보하고자 하는 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의심하게 한다.
아마도 화흠은 출세를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도덕군자인 척하는 처신은 출세에 필요한 명성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이 점을 간파했기에 조조는 악역 담당이었던 어사대부 치려조차도 꺼리는 황후폐출의 악행을 화흠에게 맡겼을 것이다. 화흠은 명망을 탐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명망은 높았지만 허울뿐이었고 실질적인 능력도 보잘 것 없었다. 예장과 회계를 손책에게 싱겁게 빼앗긴 일만 보아도 이들이 큰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어쨌든 화흠은 황후를 폐출하고 황제를 협박하는 악역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본인이 얻고자 했던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치려를 대신해 어사대부가 되었고, 조비 대에 이르러서는 건국공신으로 대접받아 삼공의 지위에 오르고 갖은 영화와 명예를 누렸다.
오늘날 화흠과 같은 사람이 우리 주변에는 없는가. 도덕군자 행세를 하면서 신중하게 처신하고,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 노력하지만 실은 이것이 다 자신의 지위와 명성을 높이기 위한 수단인 그런 사람 말이다.
위나라에서 삼공의 지위에 오른 화흠은 역사서마다 평가가 엇갈리는 논란의 인물이다.
[미화된 영웅] 화흠, 왕랑 팔아 손책에 항복
화흠(A.D 157~231년)과 왕랑은 비슷한 연배로서 다 당대의 명사였다. '세설신어' 등에 전해지는 여러 일화를 보면 당시 사람들은 화흠을 왕랑보다 더 높게 평가했던 것 같다. 그러나 화흠이 손책에게 항복한 과정을 보면 그가 얼마나 겉다르고 속다른 사람인 지 알 수 있다.
예장태수 시절 화흠은 군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광대한 관할구역 내에는 도적과 군소 군벌들이 들끓어도 손을 쓰지 못했다. 이 소식을 접한 손책은 굳이 병력을 동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손책은 우선 군대를 인근에 주둔시켜 위협을 가하면서 우번을 시켜 화흠을 회유하게 했다. 우번이 화흠을 찾아가 물었다.
"저는 귀하가 전 회계태수 왕랑과 함께 중원에서 명성이 으뜸간다고 들었습니다. 비록 동쪽 구석에 쳐 박혀 살고는 있으나 항상 우러러 보고 있었습니다."
화흠이 말했다.
"나는 왕랑만 못하오."
우번이 말했다.
"귀하께서 왕랑만 못하다 말하는 것은 겸양이 지나친 것입니다. 그러나 예장의 병사의 정예함이 회계만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손책은 불세출의 지략을 가지고 있으며 병사를 부리는 솜씨가 귀신과 같습니다. 전에 양주목 유우를 패주시키는 것은 제가 직접 보았습니다. 회계군을 평정했던 것도 또한 제가 이미 본 바와 같습니다. 빨리 계책을 도모하지 않으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 손책의 대군이 이미 척구에 이르렀습니다. 내일 중에 항서를 가지고 찾아오는 자가 없으면 저는 그대와 영영 작별을 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번이 돌아가자 화흠은 자신의 공조 유일을 불러들였다. 화흠은 명분을 잃게 될까 염려했다. 유일에게 우번이 한 이야기를 해주고 함께 대책을 의논하자, 유일도 역시 화흠에게 손책에게 항복할 것을 권했다. 화흠이 말했다.
"나는 황제가 임용했고 이미 *부절을 쪼개 갖고 있는 국가의 관리이오. 지금 경의 계책에 따르면 죽을 죄를 짓게 될까 두렵소." 유일이 말했다.
"왕랑도 조정에 의해 임용되었고 그때 회계의 병력이 매우 강했습니다. 그럼에도 정상을 참작해 이미 용서를 받았는데 부군께서는 무엇을 염려하십니까?"
유일이 핑계거리를 만들어 주었으므로 화흠은 밤새 항서를 작성했다. 다음 날 날이 밝자 화흠은 갈건에 도포를 입은 채 성 밖에 나와 손책에게 항복했다.
[거짓말 벗겨보기] 화흠이 헌제를 협박해 조서를 받아냈다고?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가 죽고 그 집단이 우왕좌왕할 때 화흠이 헌제를 협박해 조비를 왕에 봉하는 조서를 받아옴으로써 조비의 승계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또 조비가 찬위할 때 화흠이 앞장서서 헌제를 협박해 조비에게 선양하게 한다. '삼국지'는 물론 '후한서' 등 어느 사서에도 이런 기록이 없다. 단지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받을 때 화흠이 그 의례를 집전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오히려 화흠은 시류를 거역하는 시늉을 하기까지 했다. 물론 이름을 의식한 위선이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