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에서 촉한으로 통하는 험난한 통로. 강유는 이 길을 지키는 전략을 취하지 않았다. IS포토
강유는 망국의 충신인가 아니면 망국의 원흉인가. '삼국지연의'에 따르면 강유는 제갈량의 후계자로 그의 유지를 받들어 계속해서 북벌을 감행했으며, 촉이 멸망한 후에도 끝까지 나라를 회복하려 했으나 실패하는 바람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진정한 한나라의 충신이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강유로 인해 촉의 멸망이 재촉됐다는 주장도 있다. 과연 어떤 것이 사실일까?
강유는 위나라 출신으로 제갈량의 1차 북벌 때 본의 아니게 반군으로 오인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촉군에 투항했다. 제갈량이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는 것은 사실이나 그가 제갈량의 후계자가 되어 학문과 병법을 물려받았다는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제갈량은 죽으면서 촉의 조정을 장완과 비위에게 위탁했지 강유에게 맡긴 적이 없다. 또 제갈량의 유조는 자신의 사후에는 물러나 지키면서 다시는 북벌에 나서지 말라는 것이었지, 계속해서 북벌을 시도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장완과 비위는 서로 대장군 직을 주고받으면서 제갈량의 유지에 따라 오직 국내를 안정시키고 방어를 충실히 하는 일에만 주력했다. 이 덕분에 촉은 상당기간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반면 강유는 촉의 장수들 중 대표적인 호전론자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제갈량처럼 위나라와 정면으로 승부를 겨뤄 천하를 다퉈보겠다는 원대한 뜻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고향인 농서지방을 회복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을 뿐이었다. 장완의 사후 강유는 크게 군대를 일으켜 북정에 나서고자 했으나 새로 대장군이 된 비의가 이를 반대했다. 강유가 북벌을 주장할 때마다 비위가 그를 나무랐다.
“우리가 승상을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소. 승상께서도 중원을 평정할 수 없었거늘, 우리들이야 말할 것이 있겠소! 단지 나라를 지키고 백성들을 잘 다스려 사직을 지키는 것이 최선이오. 만일 요행을 노려 일전에 성패를 가르려 하다가 뜻과 같지 않을 때에는 후회해봐야 소용이 없는 일이오.”
비위의 사후 드디어 촉의 대장군이 된 강유는 이때부터 촉의 전력을 기울여 거의 매년 위나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번번히 곽회·진태·등애 등 위나라 변경의 장수들에게 저지돼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가 연속적으로 패전하자 전쟁에 지친 촉의 조정은 그를 소환하려 했다. 강유는 이에 항명하고 군대를 거느린 채 농서 답중에 눌러앉아 버렸다. 촉의 세력이 양분된 틈을 노려 위나라가 대대적으로 반격에 나서자 촉나라는 하루아침에 멸망했다.
강유의 실패원인이 무엇이었을까? 첫째 그는 자신의 실력을 과대평가했다. 미약한 국력을 고려하지 않고 매년 출병한 탓에 촉은 급속히 피폐해졌다. 둘째 그는 한 나라의 수장이 되기에는 정치력이 부족했다. 강유는 환관 황호의 발호를 누르기는커녕 오히려 참소를 당해 곤경에 처했다.
셋째 강유는 전략적 식견이 부족했다. 애초에 유비는 한중으로 들어오는 모든 길목을 철저하게 차단하는 방어전략을 수립했었으나 작은 공에 눈이 먼 강유는 적군을 한중으로 유인해 격멸하는 것으로 작전을 변경했다. 이 때문에 종회의 20만 대군은 아무 저항도 없이 한중에 입성할 수 있었으며 이는 촉 멸망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능력도 없으면서 호전성만 높았던 그로 인해 촉의 멸망이 재촉됐으니 강유는 망국의 충신이 아니라 나라 멸망의 원인을 제공한 망국의 원흉이었다.
[영웅의 이면] 강유, 위의 종회에게 극진한 대접받았다
하후패가 촉에 망명했을 때 촉의 조정은 그에게 위나라 인물들에 대해 물었다.
“사마의는 덕망이 어떠한가?”
“스스로 한 나라를 일으킬 만합니다.”
“낙양의 뛰어난 선비는 누가 있는가?”
“종회가 있습니다. 그가 국정을 운영하게 되면 오와 촉의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강유(A.D 202~264년)도 하후패에게 물었다.
“사마의가 위나라 정권을 잡았다는데 그에게 촉을 정벌할 뜻이 있소 없소?”
“그는 방금 정권을 잡아 이를 유지하는 일에 급해 바깥일에 관심을 둘 처지가 아닙니다. 종회란 자가 있는데 그가 아직은 젊지만 언젠가 오와 촉에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비상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를 임용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과연 그 후 15년 만에 종회가 촉을 멸했다. 강유가 위나라의 인사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것처럼 종회 역시 촉나라 인재들에 대한 정보수집에 열심이었던 것 같다. 이를 통해 종회는 내심 제갈량이나 그의 뒤를 이은 강유를 몹시 높게 평가했던 것 같다. 종회는 검각에서 서로 대치하면서 강유에게 편지를 보냈다.
“공께서는 문무의 덕과 세상을 경영할 책략을 지녔고, 그 공적과 명성이 *파(巴)·한(漢)을 넘어 중원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가까운 곳이든, 먼 곳이든 사람들이 그 명성에 귀의하고자 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저는 오나라의 계찰과 정나라의 자산이 우호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옛일을 생각할 때마다 늘 큰 가르침을 받고 감동한 바 있습니다.”
단순히 적장을 회유하기 위한 화려한 수사라고 볼 수만은 없는 내용이다. 강유에 대한 종회의 존경심이 절절이 묻어나지 않는가. 종회는 진심으로 강유와 대등한 관계에서 우호적 관계를 맺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래서였는지 강유가 종회에게 투항하자 종회는 그를 극진히 우대했다. 종회는 외출할 때면 강유와 같은 수레를 탔으며, 실내에서도 그와 같은 좌석에 앉았다. 종회가 자신의 *장사 두예에게 이렇게 강유를 칭찬했다고 한다.
“강유를 중원의 명사들과 비교한다면 제갈탄이나 하후현도 그를 능가할 수 없소.”
제갈탄과 하후현은 한때 위나라 최고의 명사들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종회가 강유를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 알 수 있다. 종회는 비록 항장이었지만 강유에게 촉나라 군대를 돌려주고 함께 거사를 논의했다.
[거짓말 벗겨보기] 제갈량이 강유를 계책으로 사로잡았다고?
'삼국지연의'는 천수군에서 강유에게 패한 제갈량이 계책을 써서 그를 사로잡았다 한다. 강유의 재능에 감탄해 제 사람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강유를 얻기 위해 제갈량은 이미 사로잡은 위나라의 도독 하후무를 풀어주기까지 한다. 사실이 아니다. 강유는 천수태수를 수행해 관내를 순찰하던 중 태수가 부하들의 반란을 의심해 몰래 도망치는 바람에 졸지에 반군으로 오인됐다. 오갈 데가 없어진 강유는 제 발로 걸어가 제갈량의 군문에 항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