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해서 받는 상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 상을 받으면 저주에 걸린다'고 한다. 고교야구 타자 중에서 한 해 동안 가장 높은 타율을 기록한 선수에게 주어지는 ‘이영민 타격상’ 이야기다.
이영민 타격상은 전설의 타자 故 이영민을 기리고자 1958년 대한야구협회가 제정한 상이다. 당시에는 전국대회에서 15타수 이상을 기록한 타자 중 타율이 가장 높은 선수에게 이 상을 수여했다. 이 상의 최초 수상자는 경남고 3루수 김동주였고, 2013년 수상자는 한화에 지명된 조영우(18·제주고 졸업예정)다. 하지만 이 상을 받은 선수들 중 유독 불운에 시달린 선수들이 많았다. 특히 프로야구가 생기고 나서 이 상을 받은 신인 선수들이 하나같이 부진에 빠지자 ‘저주’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저주는 있다…꽃을 피우지 못한 강혁, 조현, 신민기
1991년 수상자인 강혁(39·전 SK)이 대표적인 예다. 강혁은 신일고 시절부터 프로에서도 바로 통할만큼의 재능을 가진 타격 천재로 알려졌다. 하지만 1991년 말 당시 OB 베어스(현 두산), 한양대와 이중 계약을 하면서 문제가 됐다. 결국 강혁은 한양대에 입학하게 됐지만,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는 강혁에게 영구 제명이라는 중징계를 내렸다. 대학 졸업 후 어쩔 수 없이 실업팀 현대 피닉스를 선택한 강혁은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우승을 계기로 이듬해 두산에 입단할 수 있게 됐다. 2000년 8월에는 음주운전 후 뺑소니 사건을 일으켰고, 결국 시즌 후 SK로 트레이드됐다. 또 강혁은 2004년 불어 닥친 병역 비리에도 연루됐다. 원래 1998년 아시안게임 우승으로 병역 면제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 이전에 병역 비리에 연루된 사실이 적발되면서 군복무를 하게 됐다. 2007년 제대 후 SK로 다시 돌아왔지만 더 이상 그의 자리는 없었다.
강혁 이외에도 LG와 해태를 거쳐 한화에서 은퇴한 조현(37)도 저주에 시달린 대표적인 케이스다. 조현은 신일고 2학년 때인 1993년 이 상을 받았다. 조현은 1995년 LG에 입단하면서 대형 타자로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부상과 부진이 겹치면서 5시즌만 뛰고 은퇴했다. 이 때문에 조현 역시 이영민 타격상의 저주를 말할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선수다. 공교롭게도 강혁과 조현은 신일고 2년 선후배 사이다. 신일고는 이영민 타격상 수상자(5명)를 가장 많이 배출했다.
경남고 신민기(33·전 한화)는 1997년과 1998년 2년 연속 이 상을 수상했다. 이 상을 두번이나 받은 선수는 신민기가 유일하다. 하지만 신민기 역시 저주를 피해갈 수 없었다. 고교 졸업 후 한양대에 진학한 신민기는 2003년 기대를 받고 한화에 입단했지만, 첫해 21경기에 출장한 것이 프로 1군 경험의 전부였다.
저주는 없다…그러나 부담은 있다
어떤 상이든 받으면 기쁘다.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상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하지만 상에는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도 덤으로 따라온다. 실제로 상을 받은 몇몇 선수들은 "주위의 기대가 부담스러웠다"고 했다. 잘하면 본전이지만 부진하면 질책은 두배로 돌아온다. 특히 아마 시절 최고의 선수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입단한 선수들이 심리적 부담을 이겨내기 쉽지 않다. 또 저주라는 말이 쓰이면서 선수들이 느끼는 부담은 두배가 됐다. 2012년 수상자 김민준(19·넥센)은 수상직후 “사람들이 저주를 피해갈 수 있겠냐고 걱정부터 하더라”고 했다.
하지만 기대를 받고 프로에 왔지만 기량을 만개하지 못하고 불운을 겪은 유망주가 수상자들 뿐만은 아니다. 또 백인천, 이광환, 김일권, 이만수, 김경기 등 한국 야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스타들도 이영민 타격상을 받았다. 이미 2004년과 2005년 수상자인 최정(SK)과 김현수(두산)가 프로에서 맹활약하면서 저주라는 말조차 무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