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선은 어리석은 바보는 아니었다. '삼국지연의'는 그를 어리석고 유약한 인물로 그리고 있으나 실제로 그의 처신을 보면 현실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지녔으며 어떤 면에서는 영민했다고 볼 수도 있다. 당양 장판의 싸움에서 유비가 간난아기였던 유선을 내동댕이쳐서 머리가 아둔해졌다든가 하는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다만 난세의 군주로서의 자질을 갖추었는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유선은 밑바닥에서부터 자수성가하며 야심을 키워왔던 그의 부친 유비와는 성장배경이나 천품이 너무도 달랐다. 세상에 나온 이래 고생이라고는 겪어 본 적이 없으니 근성이나 야망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익주의 대학자 맹광과 유선의 비서 극정이 그의 자질에 대해 토론한 내용을 보면 유선은 그저 부모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기대에 부응하고자 노력하는 착한 아들일 뿐이었지, 천하를 제패하려는 야망은 물론 난세의 군주로서의 책략과 판단능력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유선에게는 권력의지가 없었다. 유선은 제위에 오르자 제갈량에게 모든 국사를 위임하면서 말했다.
"정무는 제갈씨가 행하라 하시오. 과인은 제사나 지내겠소."
유선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긴 했을 것이다. 제갈량은 승상에 익주목을 겸임해 군국의 모든 권한을 장악했다. 유비가 생전에 의도했던 것과는 달리 제갈량을 견제할 만한 세력은 모두 죽거나 실각한 상태였다. 제갈량이 권력을 독점한 상황에서 유선이 그와 권력을 다투어봐야 좋을 일이 뭐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제갈량이 죽은 후에도 정사에 무관심한 유선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상서령으로 국사를 맡은 장완은 그 지위나 권력이 제갈량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유선은 충분히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었음에도 이를 자발적으로 포기해 버렸다. 조금 지나 장완이 믿을 만 하다고 생각되자 다시 모든 군국의 대사를 일임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가 최초로 한 일은 황제가 된 후 처음으로 궁전 문밖을 벗어나 관광을 하러 다닌 것이다. 유선은 촉군 전현으로 유람을 가 전망대에 올라 경치를 구경하고 열흘 정도 신나게 놀았다. 한마디로 유선은 머리 복잡한 정무는 믿을 만한 신하에게 맡기고 자신은 여유 있게 인생을 즐길 생각이었다. 이후 유선은 계속해서 정사와 군무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사치와 향락에 빠졌다.
유선의 문제점은 지력이 모자란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가장 큰 문제는 일국의 군주가 되기에는 너무나도 권력의지가 부족했다는 점이다. 그는 어렵사리 제 손 안에 되돌아온 권력조차도 아랫사람에게 냉큼 맡겨버릴 정도로 국가의 통치나 권력 행사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그저 곱게 큰 부자집 도련님처럼 풍부하고 즐거운 삶만 보장되면 다른 일은 아무래도 괜찮았다.
초주가 항복을 권유했을 때 그는 내심 다행이다 싶었을 지도 모른다. 행사할 생각도 없는 권력을 쥐고 불안에 떨고 살기보다는 안락한 생활만 보장된다면 다른 사람의 밑에 들어가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싱겁게 항복했다. 그 대가로 안락하고 안전한 삶을 얻었다. 될 수 있으면 남들에게 어리숙하게 보이려 애쓰며 말이다. 권력의 화신이었던 그의 부친 유비가 보면 땅속에서도 벌떡 일어날 일이었겠지만 유선은 그 덕에 안심입명할수 있었다.
서울 강남의 한 중식당 담벼락에 새겨진 유비·관우·장비의 부조물. 유선은 사마소 밑에서 안락하게 생활했다.
[영웅의 이면] 유선과 손호
촉한이 망한 후 유선(A.D 207~271년)은 일가권속들과 함께 낙양으로 붙잡혀 갔다. 위나라에서는 그를 안악현공에 봉하고 식읍 만호를 주었으며, 비단 만 필과 노비 백 명도 하사해 주어 예전처럼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유선이 낙양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마소가 그를 위해 연회를 베풀어주었다. 사마소가 옛 촉나라의 가기들을 불러 노래하고 춤추게 하자, 유선을 수행한 옛 촉나라 사람들은 다 슬픈 표정을 지었으나 유선만은 평소와 다름없이 즐거워하며 태연자약하게 웃었다. 사마소가 유선에게 물었다.
"자못 촉나라가 생각나지 않나요?"
유선이 대답했다.
"이처럼 즐거움 속에 살고 있는데 어찌 촉나라가 생각나겠습니까."
어이가 없어진 사마소가 측근 가충을 돌아보며 말했다 한다.
"사람이 생각이 없음이 어찌 저 정도에 이르렀을까! 비록 제갈량이 살아있었다 할지라도 오래 온전하게 보필하지 못했을 터인데 황차 강유였으니 오죽했겠소?"
유선을 끝까지 수행했던 촉나라 신하 중에 극정이란 사람이 있었다. 극정이 이 말을 듣고 유선에게 조언했다.
"만약에 사마소가 고향이 그립지 않으냐고 물으면 의당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답해야 합니다. ‘조상의 분묘가 멀리 촉나라 땅에 있으니 서쪽을 생각하면 마음이 슬픕니다. 하루도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그리고는 눈을 지그시 감으십시오. 어쩌면 사마소가 촉으로 돌려 보내줄 지도 모릅니다."
유선은 철저한 감시 하에 있었으므로 이 두사람의 대화는 모두 사전에 사마소에게 보고됐다. 후일 사마소가 다시 촉이 그립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유선은 극정이 시킨 대로 대답했다. 사마소가 빈정거렸다.
"어찌 그리도 극정이 말해주었던 것대로 대답을 하시오!"
유선은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진실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다 비웃었다 한다. 유선의 이런 어리석은 행동은 동오의 마지막 군주 손호(A.D 242~284년)의 당당한 태도와는 사뭇 비교가 된다. 역시 망국 군주인 손호가 낙양에 포로가 되어 끌려왔을 때 서진의 초대 황제 사마염이 그를 잔치에 초대했다. 사마염이 손호를 보고 자신의 옆에 놓인 자리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짐은 이 자리를 마련해 놓고 그대를 기다린 지 오래였다."
손호도 당당하게 대거리를 했다.
"저도 건업에 그런 자리를 하나 마련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마염은 웃었다. 사람들은 손호가 비록 망국의 군주였지만 기개가 있다고 말하며 유선과 비교했다.
그러나 손호는 진나라에 항복한 바로 이듬해에 죽었는데 아직 한창인 나이였다. 그의 사인에 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아마도 정상적인 죽음은 아니었으리라 추측된다. 망국의 군주가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는다면 그냥 살려두는 것은 늘 불편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유선의 우둔한 듯한 행보가 오히려 현명한 처신이었다. 유선은 이때까지 살아남았고 나름대로 가문을 보전하며 그 후대까지도 잘 살았다. 어리숙해 보여 의심을 피하는 것, 그것이 유선의 생존전략이었을지도 모른다.
[거짓말 벗겨보기] 유선이 제갈량의 제사를 지냈다고?
'삼국지연의'는 제갈량이 죽자 유선은 친히 제갈량의 유해를 *정군산에 안장하고 면양 땅에 사당을 세워 계절에 따라 제사를 지내게 했다고 한다. 사실과 많이 다르다. 제갈량이 죽자 여러 곳에서 그의 사당을 건립하고자 했으나 유선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백성들은 하는 수 없이 제각기 들판이나 민가에서 제사를 지냈다. 유선이 면양에 제갈량 사당 건립을 허락한 것은 제갈량이 죽은 지 20년 가깝게 지난 후였다. 그것도 여론의 압력에 못이겨 마지못해 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