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 취임한 롯데 최하진(54) 사장은 신설된 미래혁신TF팀에 '세이버메트릭스(Sabermetrics)'를 공부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선수 평가에 '세이버메트릭스'를 적극 활용하겠다는 취지였다. 세이버메트릭스는 야구 기록을 통계학의 방법론으로 해석해 선수와 팀의 가치를 평가하는 분야다.
◇메이저리그의 성공 사례
1971년 미국에서 SABR(미국 야구 연구 협회·Society for American Baseball Research)이 만들어지면서 야구 통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됐다. 1980년 SABR의 멤버였던 빌 제임스(65)에 의해 세이버메트릭스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됐다. 제임스는 "야구를 좀더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시도"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세이버메트릭스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야구 지식은 물론 수학, 통계학에 대한 이해도 필요했다. 또 이 방법론은 기존의 통념을 뒤바꿔 놓는 결과가 많았다. 예를 들어 '무사 1루에서 번트를 대 주자를 2루로 보내는 것보다 강공을 선택할 때 득점 확률이 높다'는 번트 무용론이나 '타율보다 출루율과 장타율이 더 중요하다'는 식의 접근이었다. 이런 접근은 야구 현장에서 공감을 얻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세이버메트릭스는 소수의 야구 마니아들의 전유물로만 취급받았다. 하지만 빌리 빈 오클랜드 단장의 이른바 '머니볼'이 성공을 거두면서 인식 변화의 계기가 됐다. 빈 단장은 출루율과 장타율을 기반해 선수를 구성했다. 기존 관점에서 보면 수준이 떨어지는 선수들이 숨겨진 재능을 맘껏 발휘했다. 빈 단장의 시도는 열악한 재정 상태 속에서 강팀을 만들기 위한 전략이었다.
빈의 성공으로 세이버메트릭스는 주류 방법론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구단들은 통계 전문가를 고용하고, 명문대학을 나온 젊은 인재를 단장으로 앉히는 등 변화를 줬다. 2002년 보스턴을 인수한 존 헨리(65)는 세이버메트릭스에 정통한 당시 28살의 테오 엡스타인(41)을 단장으로 영입했다. 또 이듬해 빌 제임스를 구단 고문으로 앉혔다. 이들은 세이버메트릭스를 선수 영입에 활용했다. 반발이 많았지만 2004년 보스턴은 '밤비노의 저주'를 깨고 86년 만에 월드시리즈 챔피언에 올랐다.
◇한국프로야구에도 부는 바람
메이저리그의 성공 사례는 국내 프로구단들에 자극이 됐다. 각 팀들은 이 방법론을 구단 운영에 적극 활용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LG는 2010년 '신연봉제'를 도입했다. 여기에 세이버메트릭스의 지표 중 하나인 '윈 셰어(Win Share)'를 활용했다. KIA 역시 지난해부터 이 지표를 연봉 협상 기준에 포함시키고 있다. 윈 셰어는 특정 선수가 팀 승리 중 몇 승 정도에 기여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다.
하지만 윈 셰어는 도입 초기 선수들의 반발을 샀다. 연공 서열을 우선시해온 국내 연봉 협상 관행과 맞지 않았다. 신인급 선수가 억대 연봉을 받은 반면 부진했던 고참 선수의 연봉은 반토막이 났다. 한 시즌 성적에 지나치게 높은 가중치를 둠으로써 연봉이 널뛰기하는 부작용이 있었던 것이다.
국내 세이버메트리션(sabermetrician) 1세대로 평가받는 박기철(56) 스포츠투아이 전무는 “일부 구단들이 세이버메트릭스 도입에 조바심을 내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시도 자체는 바람직하지만, 세이버메트릭스는 구단 직원 교육을 통해 1~2년 안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분야는 아니다. 전문가들의 참여를 통한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한 작업”이라며 "넥센과 NC의 시도가 좋은 모델이 될 만하다"고 했다.
넥센은 지난 1월 메이저리그 보스턴과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이장석 넥센 대표는 평소 세이버메트릭스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트너십을 통해 넥센은 보스턴이 시행하고 있는 세이버메트릭스를 활용한 선수 분석 및 평가 등에 대한 노하우를 전수받는다. 이장석 대표는 "아직 우리 구단은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는 부분이 많다. 5~6년 기간을 두고 시행착오를 겪다보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본다"며 "무조건 메이저리그의 방식을 쓰기보다는 보스턴의 노하우를 적용해 새로운 시스템과 모델을 만들고 발전시킬 계획"이라고 밝혔다.
NC는 세이버메트릭스 전문가를 아예 구단 직원으로 고용했다. 박기철 전무는 "영화 '머니볼'에서 빌리 빈 단장을 보좌하는 세이버메트릭스 전문가 폴 데포데스타(41·전 LA 다저스 단장)와 같은 인물"이라고 했다. NC 관계자는 “기업을 운영하면서 나타나는 오차를 줄이고, 효율성을 기하기 위해서는 수학과 통계가 활용돼야 한다”며 “야구단 운영도 마찬가지다. 선수와 구단의 결과물을 다양하고 깊이 있는 방법으로 측정하기 위해 이 분야에 역량이 있는 직원을 채용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이 그동안 프로야구가 모기업의 홍보 내지는 사회 환원 수단으로만 여겨졌던 것에서 하나의 산업으로 가고 있는 의미있는 변화라고 입을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