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는 개인에게 무어라도 내놓으라고 강요하다. 내놓을 게 없는 자는 주눅들 수밖에 없다.
시인 이가을의 신작 시집 '슈퍼로 간 늑대들'(책만드는집 간)은 내놓을 게 없는 자의 비애를 노래한다. 시인의 난청과 불완전함을 밝힌 시 '나의 오른쪽이 왼쪽에게' 뿐만 아니라 '월남치마 입은 호랑이' '슈퍼로 간 늑대들' 등이 그러하다. '월남치마 입은 호랑이'에서 화자는 스스로를 '가진 것 없는 시인'이라고 부른다.
- 떡 한 개 주면 안 잡아먹지
세종문화회관 앞. 할머니가 호랑이 얼굴 상표 붙은 붉은색 장갑을 팔고 있다
- 전 가진 것 없는 시인인걸요
떡 대신 내민 오래된 시집을 할머니가 팽개친다 바닥에 널브러진 시집에서 글자들 쏟아진다 낱말과 이미지 뒤섞인 자음 모음들 문장을 장식했던 수사들 세종로 대로변에 흩날린다 우물처럼 깊은 생활의 잠언들 슬금슬금 책 페이지를 빠져나가 낄낄대고 도망친다…
이름 없는 시인인 나 무지가 된 시집 옆구리에 끼고 울긋불긋 식당 간판 늘어진 광화문 뒷골목을 빠져나간다 어흥어흥. 월남치마를 입은 호랑이가 따라온다
'슈퍼로 간 늑대들'에서 '배고픈 늑대들이 슈퍼에 출몰했다 진열대의 도넛이 사라졌다'는 표현은 21세기 말 국가가 어린이를 확보하기 위해 연애와 결혼도 못하는 청년들에게 섹스와 출산을 권장하는 미래와 연결된다. 청년들이 국가의 '기획'에 의해 아이를 생산하는 상황에 몰릴 거라는 시인의 예상이 적중할 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