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홍명보호에 기대했던 그 축구, 알제리가 보여줬다
스포츠에서는 때로 패자가 승자보다 주목 받기도 한다. 불리한 여건 속에서 하나로 뭉쳤다면,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도전했다면 '아름다운 패배'의 주인공으로 박수 받을 수 있다. 브라질 월드컵 16강에서 전차군단 독일에 분패한 '사막의 여우' 알제리가 그랬다.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2위이자 이번 대회 강력한 우승후보인 독일과 견줘 4번의 도전 끝에 처음으로 16강 토너먼트 무대를 밟은 알제리(22위)는 초라한 파트너였다. 1일(한국시간) 포르투 알레그리 베이라 히우 주경기장에서 열린 두 나라의 맞대결을 앞두고 전문가들은 독일의 일방적인 승리를 예상했다.
알제리는 치명적인 약점도 안고 있었다. 지난 달 28일 아랍 문화권의 전통인 라마단 기간이 시작되면서 이슬람 국가인 알제리의 주축 선수 일부가 낮시간대 금식을 선언했다. 바히드 할릴호지치(62) 알제리 감독이 해당 선수들에게 "월드컵을 끝낸 이후에 전통을 지켜달라"고 부탁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가장 중요한 전통으로 치는 라마단은 이슬람력 9월 한 달을 의미하며, 이슬람 교도는 이 기간 해가 떠 있는 동안에 음식과 물을 입에 대지 않는다. 필요한 영양소를 시간대별로 달리 섭취하며 몸을 관리하는 현대 축구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풍습이다.
환경 요인까지 겹쳐 독일의 일방적인 우세로 끝날 것 같던 경기는, 그러나 예상과 달리 치열한 공방전으로 펼쳐졌다. 수비수 다섯 명을 배치해 잔뜩 웅크리며 독일의 공세를 막아낸 뒤 빠른 역습으로 상대 골문을 위협한 알제리의 전략이 빛났다. 지난 달 23일 한국을 상대로 4-2 완승을 거둘 당시 썼던 속공 전략을 재활용했다.
알제리는 독일에 슈팅 29개(유효슈팅 22개)을 허용했지만, 몸을 내던지는 육탄방어로 정규시간을 실점 없이 마쳤다. 양 팀의 승부는 연장에서 갈렸다. 연장 전반 2분, 독일 날개 공격수 안드레 쉬를레(24·첼시)가 선제골을 넣었고, 연장 후반 종료 직전에 메주트 외칠(26·아스널)이 골을 추가해 독일 승리에 쐐기를 박았다. 알제리는 연장 후반 추가시간에 압델무멘 자부(27·클럽 아프리칸)가 만회골을 터뜨렸다. 두 골을 먹은 알제리 골키퍼 라이스 엠볼히(28·CSKA 소피아)는 무려 11개의 선방을 기록해 경기 MVP에 선정됐다.
독일이 마지막에 웃었지만, 팬들의 환호와 박수는 약자 알제리를 향했다. 알제리의 투혼은 연장전에 더욱 빛났다. 라마단의 영향으로 체력이 급격히 떨어져 모두가 숨을 헐떡이면서도 독일의 파상 공세를 온 몸으로 막아냈다. 근육 경련으로 그라운드에 드러눕는 선수들이 속출했고, 일부 선수들은 실점 이후 눈물을 흘리면서도 상대 선수를 향해 돌진했다. 브라질 월드컵을 앞두고 한국 대표팀에 기대했던 투혼을 알제리 선수들이 대신 보여줬다.
경기 종료 직후 알제리는 또 한 번 하나가 됐다. 이번엔 할릴호지치 감독이 주인공이었다. 경기 내내 곁을 지킨 코칭스태프와 눈물을 흘리며 진한 포옹을 나눈 할릴호지치 감독은 그라운드 여기저기에 쓰러진 선수들을 찾아다니며 일일히 따뜻하게 격려해 감동을 줬다. 독일이 승리를 거두며 프랑스와 8강에서 만나게 됐지만, 이 경기의 주인공은 '패배자 알제리'였다.
송지훈 기자 milkyma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