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에서 가서 "폴 리(Paul Lee)를 아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활짝 웃으며 엄지를 치켜 든다.
싱가포르 축구 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주인공은 싱가포르 S리그(1부 리그) 홈 유나이티드의 이임생(43) 감독이다. 이 감독의 영어 이름이 '폴 리'다.
이 감독이 FA컵 2연패 금자탑을 눈 앞에 두고 있다.
그가 이끄는 홈 유나이티드는 지난 달 26일 브루나이 DPMM FC와 FA컵 4강 2차전에서 극적인 3-2 역전승을 거뒀다. 드라마같은 승리였다. 홈 유나이티드는 전반에만 2골을 내줘 패색이 짙었다. 하지만 후반 중반 2골을 따라붙은 뒤 종료 1분 전 한국 선수 송인영이 짜릿한 역전 결승골을 터뜨렸다. 1차전 원정에서 1-1로 비긴 홈 유나이티드는 1·2차전 합계 4-3으로 DPMM을 물리치고 결승 무대를 밟았다. 이 감독은 FA컵 2연패와 통산 세 번째 우승에 도전한다. 그는 싱가포르 진출 두 번째 해인 2011년 단숨에 FA컵 정상에 올라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작년에 또 한 번 FA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싱가포르 올해의 감독상'을 받았다. 싱가포르에서 한 명의 감독이 같은 팀으로 3번 FA컵 우승을 차지한 적은 없다.
이번 4강전은 '다윗와 골리앗의 싸움'으로 큰 관심을 모았다.
싱가포르는 9팀의 자국 클럽 외에 DPMM과 일본 알비렉스 니가타(J리그 알비렉스 니가타의 위성클럽), 하리모 무다B(말레이시아 21세 이하 대표팀) 등 3개의 외국 클럽을 참여시키고 있다. 싱가포르 팀들은 선수 전체 급여가 월 10만 달러(약 1억 원)를 넘지 못하는 샐러리캡에 묶여 있다. 반면 외국 3팀은 제한이 없다. 이 중에서도 DPMM는 구단주가 브루나이 왕자다. 감독과 선수 영입에 거액을 아끼지 않아 '동남아의 맨체스터 시티' '동남아의 광저우 헝다'로 통한다. DPMM 사령탑은 잉글랜드 블랙번 지휘봉을 잡아 국내 팬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스티브 킨(47) 감독이다.
4강전을 앞두고 많은 싱가포르 언론과 축구 관계자, 팬들은 DPMM의 우세를 점쳤다. 하지만 이 감독이 그런 예상을 멋지게 뒤엎었다. 한국 출신 다윗의 매운 돌팔매질에 종주국 영국 출신 골리앗이 쓰러진 셈이다.
이 감독의 싱가포르 도전기가 남다른 이유는 홀로 맨 땅에 헤딩하며 부딪혀 쟁취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2009년 말 수원 삼성 수석코치라는 안정된 직업을 뒤로 하고 홀홀 단신 싱가포르로 떠났다. 홈 유나이티드 감독모집 소식을 듣고 원서를 제출해 31대1의 경쟁률을 뚫었다. 홈 유나이티드는 이 감독의 한국 국가대표 선수 경력과 수원 코칭스태프로 여러 차례 우승을 이끈 지도력을 높이 샀다. 이 감독은 선수시절 1998프랑스월드컵 때 붕대투혼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공부하는 지도자에 가깝다. 수원 코치 시절 훈련을 마친 뒤 집에서 인터넷 동영상 강의를 통해 독학으로 익힌 영어 덕분에 의사소통에 전혀 어려움이 없다. 홈 유나이티드 사령탑을 맡게 된 것도 유창한 영어 실력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다.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싱가포르 선수들은 프로의식이 부족했다. 훈련시간에 늦는 일도 다반사였다. 이 감독은 때로는 엄하게 때로는 자상하게 배려하며 선수들에게 다가갔다. 승부욕과 근성을 심어줬고 이 감독의 조련을 받은 선수들은 실력이 쑥쑥 늘어 여럿이 싱가포르대표에 뽑혔다. 구단에서도 이 감독의 지도력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 홈 유나이티드와 두 번 재계약에 성공하며 현재 6년째 팀을 지휘하고 있다. 외국인지도자에 대한 텃세가 심한 싱가포르에서 이 감독은 최장수 외국인 사령탑이다.
홈 유나이티드는 다음 달 7일 발레스티어 칼사 FC와 대망의 결승전을 벌인다. 이 감독은 "이곳에서 많은 공부를 하고 있다.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팀을 만들어가는 게 쉽지 않지만 이렇게 성과를 냈을 때 재미있고 보람도 느낀다"며 "이번에 꼭 팀에 FA컵 2연패를 안기겠다"고 각오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