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동찬 명예회장(맨오른쪽)이 2007년 코오롱 제50회 한국오픈에서 우승한 비제이 싱(피지)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의 왼쪽 두번째는 당시 대한골프협회 윤세영 회장의 모습이다.
[늦은부고①]고 이동찬 명예회장이 남기고 간 큰 숙제-
한국골프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골프의 선구자-. 지난 8일 향년 92세로 타계한 우정(牛汀) 이동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전 대한골프협회 회장 역임)의 얘기다. 고인은 12일 영결식을 통해 경북 김천시 금릉공원묘역에 잠들었다. 한국 골프업계로 보면 '큰 별'이 졌다. 그는 한국골프의 근간을 책임지고 있는 사단법인 대한골프협회(KGA)의 창립을 견인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고인은 코오롱그룹 회장이었던 1985년 KGA 회장에 취임해 1996년 2월까지 11년간 재임하면서 성장 과도기에 있던 한국 골프계에 큰 힘을 실어줬다. 위에 걸린 '1컷의 사진(최광수, 이동찬 명예회장과 17년 만에 '약속'지킨 사연…)'처럼 프로골프 선수들로부터는 존경을 받았고 한국골프사에 큰 족적을 새겼다. 그 중에서도 특히 KGA 창립과 우수 선수 양성, 한국오픈 스폰서, 골프계 조세제도 개혁 등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KGA는 1959년 발족됐지만 사단법인으로 정식 인가를 받은 것은 1966년이다. 그에 앞서 KGA의 협회창립준비위원회가 구성되는데 '이동찬'이란 이름이 기록상으로 한국골프사 등장하는 것은 1965년이다. 그의 나이 43세였다. 그가 국내 재계의 기라성 같은 선배 원로들과 함께 KGA의 협회창립준비위원회으로 활동하게 된 것은 선친이자 코오롱그룹의 창업자인 이원만 회장(전 국회의원)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원만 회장은 당시 서울골프장의 회원이었고, 젊은 이동찬도 이 골프장의 회원이자 이사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다음은 KGA의 설립취지문이다.
"…(중략) 금 번 사단법인 골프협회를 설립하여 한국최고기관으로서 대외적으로 대표하여 명예 있는 전통을 가진 골프를 일반에게 널리 보급시키고 점진적으로 골프선수를 해외에 파견하여 우방제국과의 우호 증진함과 동시에 사회문화의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합니다.(중략)…"
당시 협회창립준비위원회가 구성되게 된 배경은 이렇다. 그때의 상황(용어 표현 등은 KGA 홈페이지 내용을 그대로 차용함)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4.19의거정변으로 한국골프협회는 자연 해체되고 정국은 과도기를 거쳐 장면 정권, 그리고 5.16군사혁명 등 불안전의 연속이 수년간 계속된다. 그동안 국내골프경기는 불연속으로 속개되었으나 국제경기교류는 한동안 소강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가 다시 정상을 되찾는다. (그러다가)1965년 4월 초순 서울칸트리구락부는 필리핀 키논시에 위치하고 있는 아세아마추어연맹(현 아세아·태평양아마추어연맹)으로부터 공문을 접수한다. 동연맹은 한국골프협회를 정식으로 회원국으로 가입을 의결했음을 통고해 오면서 협회의 명칭과 주소, 편제, 임원명단, 규약, 경기활동 등 참고자료와 함께 회비 100불을 송부해 줄 것을 요청해 왔다."
KGA의 창립을 촉발시킨 것은 바로 '아세아마추어연맹'으로부터 날아온 공문이 결정적이었다. 어쨌든 이를 계기로 한국을 대표하는 KGA가 새롭게 출범하게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중심에 고 이동찬 명예회장이 있었다. 그 시점을 기준으로 한다면 고인은 단순히 협회장으로 11년을 재임한 것이 아니라 무려 49년 동안 한국 골프 발전을 위해 봉사한 셈이다. 적어도 해수로 따지면 50년이 넘는다.
이동찬 명예회장은 골프장 건설에도 관심이 많았다. 1966년 11월 27일 국내 골프장 가운데서는 세 번째로 영리를 목적으로 한 '뉴코리아골프장(18홀·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소재)'을 건설한 5인의 주주 중 한 명이었다. 국내 최초의 영리 목적 제1의 골프장은 1964년 9월 29일에 문을 연 한양골프장(18홀·이후 1970년 9월 27일 18홀을 증설해 현재 36홀로 운영)이고, 두 번째는 66년 6월에 개장한 제주골프장(18홀)이다.
한양골프장은 전 삼호그룹 조봉구 회장의 작품이다. 조 회장의 얘기를 조금 더 하자면 그 당시 그는 부동산업계의 천재로 통했다. 서울 근교의 발전 전망을 미리 점치고 지금의 한양골프장 부지를 매입했다는 후문이다. 당시 그 땅은 국공유지였는데 경매 때 조 회장은 평당 38원을 써넣어 36원을 제시한 한국제지 단사천 회장을 2원 차이로 밀쳐내고 낙찰 받았다고 한다. 이 골프장의 부지 면적이 54만평이었으니까 총 2052만원에 매입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나 조 회장은 나중에 한양골프장을 12억원에, 지금의 서울·한양 골프장의 운영법인인 서울골프장(㈜한양컨트리클럽) 측에 넘기고 1975년 수원골프장(18홀·현재는 36홀 규모로 운영)을 건설했다. 조 회장은 한양골프장을 팔 생각이 없었지만 정부의 지원을 받는 P모씨 등의 관여로 하는 수 없이 매각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조 회장은 이후 1979년 제주에 오라골프장을 건설하지만 정부의 부실기업 정리조치에 의해 수원골프장은 당시 남서울호텔 계열의 삼흥개발에, 오라골프장은 대림건설에 매각되는 비운을 맞았다.
이동찬 명예회장이 참여한 뉴코리아골프장은 한양골프장보다 2년 늦게 개장했다. 당시 국내는 1954년 개장한 서울골프장(18홀·군자리코스)과 56년 조선맥주 창업주 박기선 회장이 주도해 해운대에 건설한 부산골프장(18홀), 64년에 문을 연 한양골프장(18홀), 대선발효 박병주 사장이 건설해 66년 6월에 오픈한 제주골프장(18홀·당시 아라 골프장), 같은 해 11월 5일 조성된 태릉골프장(9홀·삼군장교훈련장을 목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지시해 건설), 그리고 태릉보다 22일 늦은 11월 27일에 개장한 뉴코리아골프장까지 모두 6곳뿐이었다.
이 중에 제주골프장은 내장객이 없어서 개장 4년만인 1970년 임시휴장, 즉 폐쇄됐다가 16년 뒤인 1986년 재일교포 백창호 회장에 의해 다시 개장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뉴코리아골프장의 건설 배경은 이랬다. 60년대 초반 서울골프장에서 골프를 치고 난 우성건설 최주호 회장, 세창물산 김종호 회장, 한국제지 단사천 회장, 경산개발 우제봉 회장 등 일명 '신록회' 회원이었던 이들은 술자리에서 골프장을 건설해 운영하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는 25%씩 공동출자로 한양골프장과 인접한 지금의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당시는 고양시 원당읍 신원리) 일대 27만평을 평당 130원에 매입해 골프장을 조성하게 이른다. 단사천 회장으로서는 한양골프장의 부지를 2원 차이로 낙찰 받지 못했던 소원을 푼 셈이지만 한양골프장의 평당 38원짜리 부지에 비하면 무려 92원이나 더 비싸게 주고 산 것이다.
이후 창업멤버로 이동찬 명예회장이 참여하면서 5인의 주주로 구성됐고 출자지분도 20%로 조정됐다. 이들 가운데 우제봉 회장은 지분을 대농 박용학 회장에게, 박 회장은 다시 현대 정주영 회장에게 매각함으로써 뉴코리아골프장은 5인의 주주(최주호-김종호-단사천-이동찬-정주영) 체제로 운영됐다. 박용학 회장에게 지분을 매각한 우제봉 회장은 1972년 대구골프장(18홀)를 건설했고, 박 회장은 같은 해 관악골프장(18홀·현재의 계보 상으로는 기흥 리베라 골프장 36홀)을 매입해 운영했지만 지금은 제3자가 소유하고 있다.
뉴코리아골프장의 개장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관심은 대단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뉴코리아골프장에 자주 나와 내장객들과 특제 막걸리를 마시며 자주 담소했다는 일화는 이미 널리 알려진 얘기다. 박 대통령의 골프에 대한 특별한 관심은 평소 그린벨트를 골프장으로 만들면 명실상부한 그린벨트가 될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게 당시의 기록이다. 이에 뉴코리아골프장 5명의 주주는 박 대통령의 이 같은 심중을 읽어내고는 그린벨트를 비롯한 주변의 땅 15만평을 매입했으나 10.26사태로 인해 골프장의 확장 꿈은 무산되고 말았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 때문이었을까. 이동찬 회장은 국내 골프장시장의 팽창성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앞선 통찰력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골프장 건설 사업에는 큰 욕심이 없었던 것 같다. 자신의 아호 우정(牛汀·소가 연못가를 거닐다)처럼 아주 '느릿느릿' 갔다. 다른 기업들이 독자적인 골프장을 건설하거나 매입할 때도 뉴코리아골프장의 지분 20%가 전부였다. 정말 느릿한 행보였다. 코오롱그룹이 온전한 18홀 골프장을 조성해 개장한 것은 이 명예회장이 1966년 뉴코리아골프장에 주주로 참여한 이후 27년 뒤인 1993년이다. 현재 천안에 운영중인 우정힐스 골프장이 그것이다. 이어 1999년 오픈한 경주 마우나오션 골프장(18홀)을 포함해도 범 코오롱그룹이 소유한 골프장은 2곳뿐이다.
솔직히 골퍼들의 입장에서 보면 골프장의 편의적 최대 부가가치는 지리적인 접근성이다. 그런데 두 골프장 모두 서울 인접 골프장들과 비교하면 큰 메리트가 없는, 접근성이 크게 떨어지는 취약점을 안고 있다. '우정'으로서는 이미 물이 가득한 연못가를 거닐고 있는데 굳이 이리저리 큰 개울가를 찾아 나설 필요가 없다고 느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명예회장은 당시 '황금알'을 낳는 골프장 건설 사업 대신 1987년 국내 대기업 가운데서는 처음으로 골프용품 개발팀을 발족시켰다. 그리고 89년 엘로드 골프브랜드를 런칭했다. 그에게는 세계 유수의 골프용품 브랜드가 즐비한 시장에서 토종 국산 골프브랜드를 통해 보다 싼값에 골프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었던 야망이 있었다.
이 같은 바람은 1986년부터 현재까지 골프 국가대표와 상비군 선수들의 의류 및 용품지원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국가대표를 거치며 국내 무대는 물론이고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 진출해 한국골프의 위상을 세계 골프 무대에 각인시킨 강수연과 한희원, 박세리, 김미현 등도 주니어 선수시절 엘로드의 용품을 지원받았다.
국내 남녀 프로골퍼 가운데서는 살아있는 전설로 국내 최다승(43승) 보유자인 최상호와 최광수(15승), 박현순(6승) 등이 코오롱 소속 선수로 오랜 인연을 맺었다. 이들은 1990년대 중후반까지 코오롱골프단 소속 선수로 맹활약했다. 하지만 지금 코오롱, 즉 엘로드는 그때의 명성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또 국산 골프용품의 존재 자체도 위협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대목은 코오롱그룹의 큰 숙제이기도 하다.
어쨌든 고 이동찬 명예회장은 KGA 재임 후 2년만인 1987년에는 한국여자오픈을 창설해 여자골프 활성화에 기틀을 마련했다. 또 고인은 그 당시 국내 최고 대회인 한국오픈이 열악한 재정으로 명성에 걸 맞는 대회 개최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내가 죽기 전까지는 한국오픈을 후원하겠다"고 약속하며 이를 실천에 옮겼다.
이 명예회장은 작년까지 대회장을 찾아 선수들을 직접 격려하며 건재를 과시했다. 평소 골프를 좋아했던 그는 "(한국오픈은)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개최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코오롱그룹은 1990년부터 올해까지 내셔널타이틀 한국오픈을 주최하고 있으며, 같은 기간 동안 골프 꿈나무 육성 및 선수 발굴 차원에서 엘로드배 중·고등학생골프대회 개최를 병행하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1988년 전설적인 골퍼 아놀드 파머를, 1991년도에는 당시 세계 톱랭커였던 잭 니클라우스를 한국에 초청해 국가대표 선수와 시범경기를 주선하는 한편 주니어 선수들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최고의 레슨을 받도록 하는 등 우수 선수 발굴 육성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그는 골프의 기본 정신인 '룰과 에티켓'을 설파하고 강조했다. KGA 회장직을 맡은 첫 해에 '골프규칙교실'을 개설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골프에서 골퍼 스스로가 자신을 경계하고 또 자신의 가치를 최고로 구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룰'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이동찬 명예회장은 바로 골프의 기본 정신에 근착한 '골퍼 이동찬'이었던 것 같다. 지금 한국 골프는 여러 곳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난다.
정말 큰 위기라는 소리도 들린다. 그 체감 온도는 조금씩 다를지 모르지만 현실이 그렇다. 이는 개인과 기업에 따라 개념의 차이는 있겠지만 '룰과 에티켓'을 소홀히 한 때문이다. KGA도, 코오롱도, 국내 골프업계 종사하는 그 누구라도 냉정하게 지금의 현 상황을 깊게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우정 이동찬 명예회장이 골프계에 주고 간 최고의 선물은 바로 '올바른 골프정신'이 아닐까 싶다.
최창호 기자 chchoi@joongang.co.kr
[이동찬 회장의 경력] -1985.02~1996.02 제9대~제11대 대한골프협회 회장 -1996.02~ 현재 대한골프협회 명예회장 -1985.10 골프규칙교실 개설 -1986.09 제10회 서울아시안게임 단체 금, 개인 은메달(김기섭) -1987.08 한국여자오픈 대회 신설 -1987.10 전국체육대회 정식종목 채택 및 개최 -1990.09 제14회 세계여자아마선수권 개인전 2위(원재숙) -1990.10 제11회 북경아시안게임 여자 단체 금, 개인 금(원재숙), 은(이종임), 남자 단체 동 -1994.10 제16회 세계아마여자선수권 단체전 2위, 개인전 3위(박세리) -1994.10 제12회 히로시마아시안게임 여자 단체 은, 개인 은(강수연), 동(송채은), 남자 단체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