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아시안게임(AG) 야구 대만과의 결승전이 열린 9월28일 문학구장. 한국이 6-3으로 앞선 9회 말 투 아웃, 대표팀 1루수 박병호(넥센)가 파울 지역에 높게 뜬 공을 잡아내 마지막 아웃카운트가 채워졌다. 한국 대표팀의 금메달이 확정되자 더그아웃에 있던 모든 선수들은 태극기를 들고 그라운드로 뛰쳐나왔다. 이때 선수들 사이에서 박병호를 찾는 한 남성이 있었다. 한국야구위원회(KBO) 운영팀 소속의 류재석 과장이었다.
야구 대표팀 매니저로 AG에 참가한 류 과장은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은 공을 받기 위해 박병호를 찾았다. 류 과장은 박병호로부터 무사히 공을 넘겨 받은 뒤 더그아웃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선수들의 세리머니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의 옆에는 대표팀 매니저로 함께한 KBO 유병석 대리가 있었다. 베이스볼긱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야구 대표팀의 금메달에 기여한 두 매니저로부터 그날의 감격과 뒷얘기를 전해들었다.
정리=유병민 기자
베이스볼긱(이하 긱)="AG 대표팀 매니저는 둘이 전부였나. 인원이 적은 것 같은데."
류재석 과장(이하 류)="AG에서 공식적으로 선수단을 도울 수 있는 매니저 AD는 두 장뿐이다. 선수촌에 들어갈 수 있는 매니저 숫자가 둘뿐이라는 뜻이다. 선수촌 입촌 전에는 KBO 직원이 모두 지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AD 카드가 한정돼 있어 유병석 대리와 내가 들어갔다. 부족한 물품이 있으면 밖에 나가서 사야 하는데, 선수촌 주위에 기반 시설이 없었다. KBO 직원들이 인천 근교에 머물면서 우리와 계속 연락을 했다. 부족한 걸 요청하면 바로 구해줬다. 당시 모기가 많았는데, 모기향과 살충제 같은 물품이 필요했다."
긱="두 명이서 모든 선수들을 책임진 것인가."
류="대한체육회에서 많은 도움을 줬다. 야구는 종목 특성상 장비가 많다. 이동에 어려움이 있었는데, 자원봉사자들을 배치해줬다. 입촌 하루 전에 선수촌을 방문했는데 정말 큰 도움이 됐다. 동선을 미리 파악해놓고, 필요한 물건들은 리스트를 작성해 미리 다 구입해 선수촌에 입촌했다. 큰 문제 없이 선수촌 생활을 한 것 같다."
긱="선수들이 많은 도움을 줬다고 들었다."
류="주장 박병호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우리가 요청을 하면 이해를 한 뒤 혼자 결정을 내리지 않고 선수들에게 의사를 물어보더라. 이를 조율한 뒤 우리에게 다시 피드백을 줬다. 봉중근(LG) 역시 많은 도움을 줬다. 국제대회 경험이 워낙 많아 알아서 챙겨주더라. 제일 고참인 임창용(삼성) 선수도 많은 부분에서 이해를 해줬다. 그래서인지 선수단과 의견이 엇갈린 적이 없었다."
긱="힘을 보탠 선수들도 많았을 것 같다."
류="맞다. 김현수(두산)가 정말 큰 도움을 줬다. 후배들에게 '직원 두 분이 절대 못한다. 우리가 도와줘야 한다'고 말하더라. 김현수는 자신이 베이징 올림픽과 광저우 AG에서 고생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번 대회는 정말 편한 거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선수들에게 많은 이해를 구했다. 김현수가 중간 위치인데, 선후배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잘하더라. 선수들이 프로 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아마추어 때 생활을 잊기 마련이다. AG은 아마 대회인 만큼 제약이 많았다. 그러나 선수들이 많은 도와줬다."
유병석 대리(이하 유)="안지만(삼성)에게 개인적으로 고맙다. 안지만이 생각보다 진지하다.(웃음) 솔선수범을 많이 해줬다. '저희가 도와드릴까요'라며 먼저 움직이더라."
긱="선수들은 쉴 때 무엇을 했나."
류="솔직히 나는 선수들이 밤에 나갈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도 선수촌에서 나가지 않더라. 선수촌 안에 파라솔에 앉아 야구 이야기만 했다. 다른 종목 선수들을 만나면 인사를 나누고 사진을 찍어준 것이 전부였다. 아무래도 대표팀에 처음 온 친구들이 많아서 그런지 다들 차분한 분위기였다. 운동은 끊임없이 하더라. 몇몇 선수들은 선수촌 내 공터에 가서 스윙 연습을 했다. 방에서도 하고. 나성범(NC)은 웨이트장에 매일 가서 훈련을 했다. 시설이 넉넉치 않았는데 개의치 않고 정말 열심히 하는 모습이었다. 선수들이 어리지만 프로의식이 있구나 라는 걸 느꼈다."
긱="세대교체가 되면서 선수들 연령대가 많이 낮아졌는데."
유="맞다. 2010년에 광저우를 갔는데, 당시 선수들 대부분이 나에게는 형이었다. 그러나 올해는 3명을 제외하고 모두 동생들이었다. 아이들이 귀엽더라.(웃음)"
긱="결승전 이야기를 해보자. 지고 있을 때 기분이 어땠나. 중계 화면에 잡혔는데 초조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유="나는 류중일 감독님 바로 옆에서 기록을 하고 있었다. 지고 있을 때는 옆에 있기 민망했다. 무엇보다 분위기가 살벌했다. 공기에서 긴장감이 느껴진다고 하지 않나. 적어도 7회까지는 그랬다."
류="나는 경기 결과가 중요하지 않았다. 비가 오고 있어서 서스펜디드 게임에 대한 압박감을 받았다. 5회까지 지고 있을 때는 빗줄기가 약하지 않았다. 때문에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 8회 승부를 뒤집고 나서 승리 예감이 왔다. 그때부터는 세리머니에 대한 준비를 해야 했다. 선수들이 손에 들 태극기를 도구함에 숨겨 놓았었다. 미리 꺼내면 설레발 친다는 이야기를 들을까봐 조심스러웠다."
긱="금메달이 확정되고 나서 류재석 과정은 쏜살같이 달려나갔는데."
류="중계화면에 잡혀서 지인의 연락을 많이 받았다. 유 대리는 기록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마지막 공을 챙겨야 했다. 9회말 수비를 나갈 때 이재원(SK)과 박병호에게 언질을 줬다. 꼭 공을 챙겨야 한다고. 선수들 전원에게 미리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괜히 설레발이라는 이야기를 들을까봐 몇몇에게만 조심스럽게 말했다. 분위기가 넘어왔다는 감이 들어서 선수들에게 태극기를 쫙 뿌리고, 나는 뛰어 나갈 준비를 했다.(웃음) 다행히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은 박병호가 공을 잘 챙겨줬다. 공은 야구박물관이 완공되면 그쪽으로 보낼 예정이다."
긱="매니저는 정말 할 일이 많은 것 같다."
류="대회 규정을 완벽하게 숙지해야 하는 게 힘들었다. 예를 들어 선수들은 홈런을 치고, 하이파이브를 하면 안된다. 그라운드에서 몸을 푸는 건 투수들만 할 수 있다. 수비하는 선수를 제외한 야수들은 경기 중에 그라운드로 나갈 수 없다. 습관이 무섭더라. 선수들에게 늘 강조했지만, 프로 생활이 익숙하다보니 깜빡 할 때가 있었다. 그러다보니 내가 흥분을 하면 안됐다. 늘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금메달을 따내고 라커룸에서 선수단이 미팅을 할 때 그제서야 긴장이 풀렸다. 밖에서 담배 한 대를 태우고 '이제 끝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때도 끝나고 이동하면 밤 12시 정도 되겠다는 걸 계산하고 있었다.(웃음)"
긱="AG은 2주에 불과했지만, 준비는 일찍부터 했을 것 같다."
류="물론이다. 1년 전부터 준비를 시작했다. 우선 공인구인 일본 M사의 공을 일찍 받는 것이 중요했다. 수입 통관부터 구단 배송까지 전부 우리 몫이었다. 7~8월 안에 대표팀 투수들에게 모두 공을 보냈다. 잠실구장 대여와 연습경기 등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은 구단이 많은 도움을 줬다. LG와 두산에 감사하다."
긱="대표팀의 인기가 정말 많았다."
유="어딜 가든 팬들이 함께 있었다. 야구 인기를 새삼 실감했다. 관계자분들이 많은 도움을 주셨다. 목동구장을 갈 때 경찰차가 호위를 해준다고 하더라. 유난 떤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조심스러웠는데, 원래 해주는 거라고 하더라.(웃음) 결승전에서는 경찰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차가 막힌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선수촌에서 문학구장이 차로 10분 거리라 그렇게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교통 체증이 장난이 아니었다. 버스 기사분이 경찰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먼저 요청을 해 놓으셨다. 여러 분들의 도움이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 같다."
긱="류중일 대표팀 감독은 어땠나."
류="감독님은 우리의 일에 대해 많은 이해심을 가지고 계셨다. 합리적으로 이해를 해주신 것이 감사했다. 우리는 감독님께 어떤 상황에 대한 보고를 다 한다. 감독님이 '왜 이렇게 됐나'라고 물으면 우리는 '최선을 다했는데 이렇게, 이렇게 됐다'고 답해드렸다. 그러면 거기서 끝이다. '알았다. 수고했다'고 하신다. 감독님께서 금메달을 따낸 다음날 대한체육회 사무실을 방문해 감사 말씀을 전하시더라. 끝까지 대표팀을 책임지셨다. 대표팀 수장으로서 여러 가지 하실 일이 많은데, 사소한 것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긱="금메달을 딴 뒤 회식을 했는지 궁금하다."
유="회식은 따로 하지 않았다. 시상식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니 밤 12시가 넘었더라. 다음날 해산이어서 선수들 모두 짐을 싸야 했다. 대회를 치르면서 회식은 딱 두 차례 했다. 선수촌 식단이 계속 비슷한 메뉴가 나오다 보니 회식이 필요했다. 고기를 먹으러 갔는데, 술을 마시는 선수는 한 명도 없었다. 맥주 한 잔도 하지 않고, 고기만 딱 먹고 숙소로 돌아왔다."
긱="선수-프런트-팬이 하나가 돼야 우승을 한다고 한다. 이번 금메달 역시 그런 느낌이다."
류="맞다. 금메달도 기뻤지만, 감독님과 코칭스태프, 선수들 모두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우리가 분명 부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 이해를 해줬다. 선수들과 언성 한 번 높이지 않고, 다친 사람 하나 없이 무탈하게 대회를 마친 것이 가장 큰 행복이었다. 대표팀은 각 구단의 최고 선수들이 모인 곳이다. 선수들은 최선을 다했고, 우리는 최상의 지원을 했다. 모든 것이 잘 어우러져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