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제균(45)이 돌아왔다. 오는 17일 개봉하는 '국제시장'은 윤제균 감독이 '해운대'(09) 이후 처음으로 메가폰을 잡은 복귀작이다. 한 여름 쓰나미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냈던 '해운대'는 당시 센세이션한 돌풍을 일으키며 무려 1145만명을 동원, 쉽게 말해 '초대박'을 쳤다. 하지만 그는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갑자기 연출을 끊고 제작자로 변신해 '하모니'(09·제작,각본)와 '7광구'(11·기획), '댄싱퀸'(12·제작,각색)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 참여하며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다양한 움직임 속에서도 '2%의 아쉬움'이 남았던 게 사실. '국제시장'은 이 묵은 갈증을 날려 버릴 수 있는 윤제균 감독의 희든카드다. 195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사건(흥남철수·파독·베트남 전쟁·이산가족 찾기)과 인물들이 살아온 격변의 시대를 주인공 황정민(덕수)의 인생을 통해 생생하게 그려낸 '국제시장'은 황정민과 김윤진, 오달수를 비롯한 연기파 배우들의 조합으로 언론시사회 후 호평을 받았다.
복귀작이라는 것 이외에도 '국제시장'은 윤 감독에게 작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무엇보다 감독 자신의 이야기를 투영시켰다. 극 중 남녀 주인공의 이름인 덕수(황정민)와 영자(김윤진)는 실제 윤 감독의 부모님 성함. 그만큼 공을 많이 들였다. 장면 하나, 대사 한 마디를 허투루 할 수 없었다. 그는 최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아버지와 영화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시사회 후 반응이 나쁘지 않은데.
"반응이 좋아서 감사하기도 한데 아직 개봉을 안했고, 일반 관객의 평가가 남아 있으니까 떨리기도 한다. 겸허한 자세로 기도하면서 지내고 있다.(웃음)"
-이번 작품을 연출한 이유가 있나.
"미시적으로 보면 내 개인사에 대한…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헌사 같은 느낌이 있었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세대 간의 소통이 단절된 시기에 이 영화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조그만 계기가 됐으면 한다. 이 영화를 보고 신세대와 구세대가 소통을 할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됐으면 행복할 거 같다."
-언론시사회 때 '덕수'가 실제 아버지의 성함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는데.
"배우들한테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부분이다. 사무실 식구들만 몇 명 알고 있던 거였는데 어디서 갑자기 그런 질문이 나오더라.(웃음) 갑자기 아버지 생각이 나서 울컥하기도 했는데, 짠한 게 있다."
-아버지에 대한 애틋함이 있는 특별한 사연이 있나.
"아버지가 날 굉장히 늦게 낳으셨다. 마흔이셨는데…다른 (친구들의) 아버지보다 연세가 많으셨다. 내가 사춘기고 그럴 때 다른 친구들 아버지는 일을 하시는데, 정년퇴직을 하고 그러셨다. 캐릭터가 덕수랑 비슷하시다. 무뚝뚝하시고 잔소리도 많고, '버럭'하시는 그런 게 있었다. (당시에는) 이해가 안 되고, 자식 입장에서 마음에 안 드는 것도 많았는데 그러다가 대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다. 고맙다, 감사하다는 말도 못 드렸는데 그게 한으로 남더라. 지금은 이제 나름 먹고 살만 하니까, 없으시지 않나. 만감이 교차한다는 게 자식의 잘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그런 거 같다."
-어디가 아프셨나.
"암으로 돌아가셨다."
-영화에 애착이 갈 수 밖에 없겠다.
"아버지는 평생 가족과 자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셨던 분이셨다. '국제시장' 영화 가운데 '당신 인생인데 왜 당신이 없느냐'는 대사가 나온다. 평생 당신을 위해서 여행가는 걸 본적이 없고, 평생을 뼈 빠지게 일만 하셨던 분이다. 살아 계셨을 때 잘해주지 못했기 때문에…아버지도 하늘나라에서 보시면 칭찬해주시지 않을까 싶다. 워낙 '아들 윤제균'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던 분이다. 자식에 대한 자부심도 많으셨고, 평생의 낙 중 하나가 어디 가서 하시는 아들 자랑이었다."
-제작자에서 감독으로 복귀, 부담스럽지 않았나.
"감독이 (제작자보다) 4~5배 더 부담스럽다. 제작은 해보니까 잘못됐을 경우 핑계로 말할 수 있는 게 많다. 하지만 감독은 그렇지 않다. 말 그대로 배수의 진이다. 핑계하는 순간 자기 얼굴에 침 뱉기다. 온전히 모든 책임을 다 져야 한다는 것 자체가 힘들고 괴롭고 부담되고 그런 직업이다. 그래서 같이 작업하는 후배 감독들에게는 뭐라고 하지 않는 편이다.(웃음)"
-복귀작으로 '국제시장'을 택해 부담이 가중됐을 거 같다.
"이 영화는 직접 감독을 하고 싶었던 작품이다. 다른 감독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는 감독을 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이야기. 준비도 오래 했다."
-가장 중요한 덕수 역에 황정민을 캐스팅한 이유는.
"시나리오를 할 때부터 정민 씨의 이름을 적었다. 황정민의 연기가 아니라 '인간 황정민'이라는 진정성이 와 닿았던 거 같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그릴 때 가장 중요한 건 배우가 가지고 있는 진정성이다. 제작자와 배우로 두 번 정도 만나봤지만 배우 황정민이 아니라 인간 황정민에 대한 신뢰가 너무 컸다. 영화를 끝내고 나서 '내 생각이 옳았구나' 싶더라. 황정민이 하지 않았으면 상상이 되지 않는다."
-기대만큼 담백하게 덕수를 잘 표현해낸 거 같다.
"너무 감사하다. 정민 씨에게 두 가지 감사한데 첫째는 그 역할을 너무 잘해줘서 고맙다. 내가 생각했던 감독이 원하던 역할 이상을 해줬다. 두 번째는 캐스팅 단계에서…정민 씨는 기억을 할지 모르겠는데 2012년 12월에 시나리오를 처음 전달했을 때 직접 전화를 했다. '2013년 여름쯤 '국제시장'이라는 작품을 연출하려고 하는데 잘 읽어봐 주시라' 이렇게 말을 했는데, 정민씨가 '어떤 내용인가'하고 묻더라. '돌아가신 내 아버지에 대한 헌사 같은 영화다' 진짜 이 이야기만 했는데 '언제 촬영에 들어 가냐'고 되물었다. '내년 7~8월쯤 들어갈 거 같다'고 하니까 '내년 7월에 스케줄 비어놓고 있겠습니다. 편하게 시나리오 수정 작업하세요'이러더라. 인간적인 친분은 있지만 톱배우여서 수십개의 시나리오가 오지 않았겠나. 시나리오도 보지 않고, 인간 윤제균을 믿어줘 고맙다."
-다정다감했던 덕수가 마지막에 가서는 고집줄통이 되는데, 특별한 개연성은 없다.
"사실 덕수 캐릭터가 꽉 막히고, 꼬장꼬장하게 변했느냐, 그 이유가 뭐냐에 대해 시나리오 단계에서도 설명을 해줘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어떤 계기로 사람이 이렇게 됐다고 말하기에는 어떤 하나의 계기가 사람을 그렇게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연들을 조금씩 보여주면 관객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를 원했다."
-황정민과 호흡을 이룬 오달수의 코믹연기가 극강이더라.
"실제 만나보면 진짜 진지하다. 안 웃긴다. 하지만 장면을 편집하면 그렇게 재밌는 거다. 뭔가 특이한 배우다. 인간적으로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한 단계 사람에 대해 달관을 한 느낌이랄까. 인간적으로 존중을 할 만한 사람이다. 지식 수준도 높고, 철학적이기도 하다. 점잖고 젠틀하고…찍을 때는 잘 모른다. 좀 더 나가도 될 거 같은데, 좀 더 웃길 거 같은데 하지 않더라. 못하는 가 보면 안하는 거더라."
-어떤 의미인가.
"나중에 사석에서 '선배님이 따먹을 수 있을 거 같은데, 못하신 게 아니라 안하신 거 같다'고 말을 하니까 '조연이 주연을 잡아먹으면 영화가 망한다'고 하시더라.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를 계산하고 하신 분이다."
-영화 사이사이에 앙드레김, 남진, 이만기 등 재밌는 요소를 넣었는데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흥남철수, 파독, 베트남 전쟁까지 시퀸스가 너무 다 드라마틱하다. 감정의 굴곡도 심하다. 그래서 시퀀스를 쉬어가는 텀(시간)이 필요했다. 주조연 배우들은 다음 시퀀스에 드라마틱한 감정선을 따라 가야하니까 쉬어가는 타이밍을 결국 제3자가 해줘야 했다. 그래서 역사적인 시대를 관통했던 아이콘들을 넣었다. 단 정치적인 시선을 철저하게 배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장 궁금했던 게 씨름선수 이만기를 넣은 이유다.
"스포츠 스타 중에 후보 1번이 차범근(축구), 2번이 홍수환(권투), 3번이 김일 선생님(레슬링)이셨다. 왜 이만기 선생님을 했느냐면 (영화 막바지에 그려지는) 이산가족 찾기가 1983년 여름인데 제1회 천하장사가 83년도 추석에 나왔다. 전통 스포츠고 가장 우리의 것인데 인기가 사라져가고 있지 않나.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존경심과 아쉬움을 고려해 어느 인물을 넣을지 치열한 고민 끝에 선택했다."
-이산가족을 연기한 어른 막순이의 연기도 대단하더라.
"영화의 모든 캐스팅을 통틀어서 제일 공을 들였던 게 어른 막순이다. 조감독이 미국을 두 번이나 다녀왔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연기를 조금이라도 하는 30대 재미교포는 거의 대다수가 오디션에 참가했다. 어린 막순이의 이미지 등을 고려해서 캐스팅했다."
-이산가족이 이뤄지는 방송국이 인상적이었다.
"남원에서 그 장소를 찾았다. 방청객들의 모습이 중요했는데, 남원 KBS 방송국이 그 때 모습을 가장 비슷하게 갖고 있어서 남원에서 촬영을 진행했다."
-마지막에 방 안에서 흐느끼는 덕수와 거실에서 웃고 있는 아들, 딸들의 모습이 묘한 대비를 이룬다.
"그 장면 때문에 '국제시장'을 하게 됐다. 감독 입장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다. 그 장면으로 말해주고 싶었던 건 결국 그 사람(덕수)도 누군가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국제시장'은 누군가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아들, 딸, 자식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관객을 가르치고 싶거나 그런 건 전혀 없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이 투영된 작품이다."
-'국제시장2'도 생각 중인 거 같은데.
"이번 영화가 잘 되면 8~90년 격동의 시대, 민주화와 IMF 등을 덕수 가족을 통해 그려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