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장도 인정했다. 마지막까지 치열한 우승 경쟁을 펼쳤던 유재학(53) 울산 모비스 감독이 상대의 투혼에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말이다.
전주 KCC가 '12연승'을 질주하며 2015-2016시즌 프로농구 정규리그 최종전에서 우승을 확정지었다. KCC와 모비스는 21일 각각 최종전을 앞두고 나란히 35승18패로 공동 1위였다. 우승의 향방은 정말 '안개정국'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날 두 팀 모두 승리했다. KCC는 안양실내체육관에서 안양 KGC를 86-71로 무너뜨렸다. 모비스 역시 인천삼산월드체육관에서 인천 전자랜드를 89-70으로 꺾었다. 두 팀은 약속이나 한 듯 또 다시 36승18패로 동률을 이뤘다.
그러나 상대전적에서 4승2패로 앞선 KCC가 1위의 자리에 올랐다. 전신인 대전 현대의 1999-2000시즌 정규리그 우승 이후 16년 만이고, 2001년 KCC로 팀 이름을 바꾼 뒤 첫 우승의 신화를 썼다.
KCC는 전반기를 16승11패로 마쳤지만 후반기에 무려 20승7패를 거뒀다. 이 무서운 뒷심이 정규리그 우승 판도를 뒤집었다. 고양 오리온-울산 모비스의 양강 체제를 뚫고 선두로 올라선 KCC가 리그 막바지를 12연승으로 마무리하며 정규리그 정상에 올랐다. 1999-2000시즌 이후 16시즌 만의 값진 우승이다.
사실 전반기까지만 해도 KCC는 플레이오프 진출에 목표를 둔 중상위권팀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소리없는 반등이 시작됐다. 뒷심이 놀라웠다. 4라운드 5승4패, 5라운드 6승3패를 기록하더니 우승 경쟁에 뛰어든 6라운드는 9전 전승으로 마무리했다.
이 놀라운 뒷심의 원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패배의식 버리고 승리 DNA
KCC 추승균(42) 감독은 팀이 보여준 무서운 뒷심의 원동력을 선수들의 자신감에서 찾았다. 그냥 자신감이 아니다. 이 뒷심은 작년 말 홈 10연승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돼 브레이크 없이 계속됐다. 차곡차곡 승수가 쌓여가면서 선수들 몸 안에는 '승리 DNA'가 축적됐다.
올 시즌 처음 정식 사령탑에 부임한 추 감독은 팀 지휘봉을 잡았을 때 우승은 "언감생심이다"고 했다.
마음 속으로 '6강만 가자'고 다짐했다. 팀이 3시즌 연속 하위권에 머무르는 사이 선수들이 패배 의식에 젖어있었기 때문이다. 기술, 전략적인 부분은 몰라도 심리적인 부분은 쉽게 이겨내기 힘든 요소다. 그래서 추 감독은 시즌 초부터 아무리 약한 팀을 상대하더라도 이를 악물고 이기라고 주문했다. 패배가 불러올 사기 저하를 막기 위해서였다.
결과적으로 선수들은 추 감독의 기대에 100% 부응했다.
추 감독은 "선수들이 이렇게까지 해줄 줄 몰랐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패배 의식을 떨쳐내고 이기는 재미에 중독된 선수들은 거침없는 12연승으로 정규리그 우승이라는 방점을 찍었다. 안드레 에밋(34)과 하승진(31), 전태풍(36) 등 화려한 주전 군단의 뒤에서 묵묵히 제 일을 해준 식스맨들도 KCC의 우승을 뒷받침했다.
추 감독은 "베스트 멤버는 우승을 한 번씩 해보지 않았나. 그래서 식스맨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며 "정희재, 신명호, 김태홍은 화려하지 않지만 앞장서서 궂은 일을 해주고 수비에서 제 몫을 해줬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이어 "선수들 자신감이 붙은 게 큰 수확이다. 이기는 경기를 많이 할수록 승리 DNA가 축적되는 것 같다"며 "이번 시즌을 통해 생긴 DNA를 앞으로도 잊지 않도록 선수들과 내가 모두 노력해야할 것 같다"고 미소지었다.
◇경기장 달군 팬들 응원
KCC의 뒷심이 꺾이지 않도록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또 다른 배경은 팬심이다.
21일 정규리그 최종전에서 안양 KGC인삼공사 마리오 리틀(29)이 자유투를 던지기 위해 공을 잡자 찢어질 듯한 야유가 사방에서 쏟아졌다. 체육관 안을 뒤흔드는 어마어마한 야유에 위축된 리틀은 주어진 자유투 3개 중 단 1개만 성공하며 고개를 떨궜다. 리틀의 자유투가 연이어 실패하자 관중석은 더욱 달아올랐다.
누가 보면 KCC의 홈인 전주실내체육관이라고 착각하기 쉬운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날 경기 장소는 KGC의 홈인 안양실내체육관이었다. 이날은 홈팀 KGC가 아닌 원정팀 KCC가 주인공이었다. 그 정도로 안양으로 원정 온 KCC 팬들의 응원 열기는 뜨거웠다.
정규리그 우승의 주인공을 결정짓는 빅매치여서 그런지 약 5100석 규모의 안양실내체육관은 입추의 여지없이 꽉꽉 들어찼다. 중간중간 자리를 구하지 못한 팬들이 서서 경기를 지켜보는 모습도 보였다.
이날 경기 뿐 아니라 응원전에서도 KCC가 '판정승'을 거뒀다. 멀리 전주에서 팀의 우승을 지켜보기 위해 올라온 팬들을 포함한 KCC 원정석에서는 경기 종료를 알리는 버저가 울리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환호와 함성이 쏟아졌다.
KCC 선수들도 입을 모아 "팬들 응원이 우리 팀의 경기력과 합쳐져서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 같다"고 싱글벙글하며 감사 인사를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