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차게 뿌린 오승환의 빅리그 첫 번째 공이 폭투가 됐다. '긴장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승환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돌부처'라 불리는 오승환이지만, 엄청 떨렸을 것이다. 그토록 꿈꾸던 빅리그 무대. 그것도 시즌 개막전에서 에이스 다음으로 마운드에 올랐다. 긴장이 안 된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첫 공을 던지고 나면 정신이 번쩍 든다. 등판하기 전 느낀 벅찬 감정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타자와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오승환의 4일 데뷔전을 지켜보며 15년 전이 떠올랐다. 레드삭스 시절 유니폼을 입고 2001년 6월16일(한국시간) 애틀란타를 맞아 빅리그 데뷔전을 치렀다. 아쉬움 속에 6회 마운드에 올랐다. 원래 선발 등판이 예정돼 있었다. 상대 애틀란타 선발은 나의 우상 그렉 매덕스. 늘 꿈꿔왔던 매덕스와의 맞대결이 성사되는 듯 싶었다.
하지만 경기를 앞두고 우리 팀 선발이 롤란도 아로호로 바뀌었다. 빅리그 데뷔의 설렘보다 매덕스와 맞대결이 물거품 된 것에 아쉬움이 더 컸다.
오승환처럼 나도 긴장감 속에 마운드에 올랐다. 첫 공으로 직구를 던졌는데, 상대 타자의 방망이가 바로 반응했다. 깜짝 놀랐다. 초구는 지켜볼 거라 생각했는데, 노리는 공이 들어오니 지체없이 스윙이 나왔다.
뜬공으로 첫 타자를 잡아내고, 유격수에게 공을 받았다. 정신이 없던 순간에 '이 공을 간직해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바로 후속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생각할 겨를 없이 다음 승부를 했다. 기념구를 챙기지 못한 것이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4일 오승환 경기를 중계하며 "비록 폭투가 됐지만, 오승환 선수 첫 공을 챙겨야 합니다"고 한 건 이때 경험 때문이었다.
오승환은 첫 타자 맷 조이스를 상대로 흔들렸다. 제구가 되지 않으면서 볼 3개를 내리 던졌다. 스트라이크와 파울을 얻어내 풀카운트가 됐다. 여기서 포수 야디에르 몰리나의 선택에 놀랐다. 몰리나는 풀카운트에서 오승환에게 체인지업을 요구했다. 한국과 일본에서 풀카운트라면, 빠른 공을 던져야 하는 카운트다.
그러나 몰리나는 오승환의 능력을 인정하고, 체인지업 사인을 냈다. 비록 볼이 돼 볼넷을 줬지만, 의미가 있는 승부였다.
후속타자 존 제이소를 빠른 공 2개로 내야 땅볼로 처리하며 오승환은 안정을 찾았다. 다음 상대는 피츠버그 중심 타자 앤드류 맥커친. 오승환이 인터뷰에서 밝혔지만, 최대한 어려운 승부를 펼쳤다. 이때부터 몰리나가 슬라이더를 주문하기 시작했다. 오승환의 슬라이더가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사인을 많이 낸 것 같았다. 슬라이더 각은 한국과 일본에서 보여준 것보다 훨씬 많이 휘어졌다. 오승환이 힘을 많이 준 것 같았다.
맥커친을 상대로 테스트를 마친 슬라이더는 다음 타자를 상대할 때 결정구가 됐다. 오승환은 데이빗 프리스와 스탈링 마르테를 맞아 빠른 공으로 카운트를 잡았다. 그리고 승부구로 슬라이더를 선택해 잇따라 삼진을 뽑아냈다.
주자가 있는 풀카운트 상황에서 결정구로 슬라이더를 주문한다? 오승환에 대한 몰리나의 믿음이 드러나는 사인이었다. 우타자에게 3-2의 슬라이더는 볼넷 위험이 높은 공이다.
위기도 있었지만, 오승환은 결국 무실점으로 데뷔전을 마쳤다. 포수 몰리나의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몰리나의 경기를 보면 몸쪽 승부를 즐겨한다.
그러나 이날 웨인라이트가 맥커친을 맞힌 뒤론 몸쪽을 많이 요구하지 않았다. 오승환도 인사이드 공략에 능하다. 그럼에도 몰리나는 바깥쪽 승부를 주로 했다. 프레이밍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프레이밍은 아슬아슬하거나 살짝 빠지는 공에 스트라이크 콜을 얻어내는 능력이다. 오승환의 첫 번째 삼진이 대표적이다. 슬라이더가 바깥쪽으로 빠지는 것 같았지만, 화면 상으론 빠지기 전에 잡아낸 듯 보였다. 이런 캐치 하나가 투수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
오승환의 등판 시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0-3으로 뒤진 7회 등판을 두고 '추격조' 역할을 부여받았나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세인트루이스는 직전 0-2로 뒤진 6회 공격에서 1사 만루 기회를 잡았다.
오승환은 이때부터 몸을 풀었다.
매서니 감독은 6회 공격에서 득점이 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추격 또는 동점 상황에서 오승환을 내보낼 계획이었다. 오승환이 코칭스태프에 확실한 믿음을 주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 대목이었다.
시즌 첫 메이저리그 중계에서 오승환의 투구를 보게 돼 기뻤다. 여기에 반가운 얼굴이 보여 더욱 즐거웠다. 세인트루이스의 맷 홀리데이는 콜로라도 시절 한솥밥을 먹었다. 지난 겨울 오승환에게 '선우 형, 홀리데이 선수가 형 안부를 물었어요'라고 연락이 왔다. 스프링캠프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같이 뛰던 시절 큰 아들이 클럽하우스를 자주 놀러왔는데, 이제는 셋째 꼬마를 데려온다고 했다. 이런 추억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나는 1997년 아무런 정보 없이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맨땅에 헤딩'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은 세상이 변했다. 인터넷과 SNS를 통해 각종 정보를 섭렵한다. 빅리그에 진출한 후배들의 플레이와 행동을 보면 '나는 왜 그렇게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먼저 시작하는 선배가 있기 때문에 뒤를 잇는 후배가 생긴다. 또한 지금 후배들을 보고 어린 친구들이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야구가 존재하는 이유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