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구안', 미국에선 '배팅 아이(Batting Eye)'라고 한다. 타자에게 매우 중요한 능력이다. 생명과도 같다고 한다.
선구안은 정지시력보다 동체시력, 즉 움직이는 물체를 정확하고 빠르게 인지하는 능력과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동체시력이 좋은 선수가 그렇지 않은 선수보다 타석에서 훨씬 유리하다.
많은 은퇴 선수가 "나이가 들면서 눈이 점점 안 좋아지고, 공이 잘 안 보이면서 야구를 그만할 때가 왔다는 것을 알았다"고 토로한다. 메이저리그 구단들은 아예 시각 전문의를 고용해 몸값 비싼 소속 선수들의 눈을 직접 관리하기도 한다. 좋은 타격은 공을 '잘 보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승엽과 양준혁, 최상급 동체시력
로버트 어데어의 저서 '야구의 물리학'에 따르면, 타자의 눈은 투수가 던진 빠른 공이 플레이트까지 날아오는 0.4초 동안 공의 위치 정보를 뇌에 전달한다.
초당 16개의 프레임으로 구성된 활동 사진과 유사하다. 눈으로 뭔가를 보고 의식적으로 근육이 반응하는 데 0.15초가 걸린다. 그렇다면 0.4초는 눈을 고작 두세 번 정도 깜빡일 정도의 시간이다.
그 찰나에 타자는 상대 투수의 구종과 코스를 가려내고 스트라이크인지 볼인지를 판단해 배트를 휘두를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눈의 '순발력'을 좌우하는 동체시력은 그래서 중요하다.
실제로 수많은 레전드 타자들은 탁월한 동체시력으로 유명했다. 한국 프로야구 역대 최고 타자인 삼성 이승엽이 대표적이다. 류중일 삼성 감독은 은퇴 2년 전인 1997년 STC(삼성 트레이닝 센터)에서 진행된 선수단 체력테스트에서 이승엽의 눈을 보고 감탄한 기억이 있다.
류 감독은 "팔과 다리의 근력, 러닝 후 체력 회복 속도 등 여러 가지 항목을 체크하는데, 그 가운데 동체시력 검사가 포함됐다"며 "빠르게 움직이는 숫자 9개를 연이어 보고 순서대로 읽어내는 방식이었다. 나는 3개 정도만 맞췄는데, 승엽이는 상당수를 정확하게 봤다. 깜짝 놀랐다"고 회상했다.
[ `국민타자` 이승엽 / 삼성 라이온즈 ]
이승엽은 입단한지 얼마 안 된 20대 초반의 선수였고, 류 감독은 은퇴를 앞둔 베테랑이었다. 그러나 이승엽의 동체시력은 놀라운 수준으로 평가 받았다.
당시 삼성스포츠과학지원실 자료에 따르면, 이승엽은 동체시력 테스트에서 0.1초 후에 사라지는 9자리 숫자를 6자리까지 놓치지 않고 읽었다. 일반인 평균(3자리)보다 두 배나 많은 수치. 선수들 가운데서도 최상위권이었다.
[ 양준혁 / 前 삼성 라이온즈 ] 양준혁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도 당시 이승엽과 같은 테스트에서 최상급 동체 시력을 인정받았다. 한국 프로야구 역대 최다 볼넷을 얻어낸 양 위원은 현역 시절 양쪽 시력이 모두 2.0이었다. 그만큼 탁월한 눈을 타고 났다. 현역 시절 한창 타격감이 좋을 때는 "날아오는 야구공에 찍혀 있는 '한국야구위원회'라는 글자까지 다 보였다"는 농담을 했을 정도다.
◇이치로와 추신수의 동체시력 유지법
노화는 자연적인 현상이다. 아무리 눈에 좋은 음식을 먹고 영양제를 섭취해도 나이가 들면 시력 저하를 막을 수 없다. 오 사다하루, 오치아이 히로미쓰처럼 일본 프로야구를 주름잡은 명 타자들도 시력과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해 은퇴를 결심했다고 알려져 있다.
동체시력이 떨어지면 타격 뿐만 아니라 수비에도 영향을 미친다. 움직이는 공에서 눈을 떼지 않고 끝까지 보는 집중력도 동체시력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시력이 좋은 선수는 한창 때 날아오는 공 옆의 공간까지 동시에 볼 수 있는 능력(주변시력)을 뽐낸다. 그러나 나이를 한 살씩 먹을 때마다 이 능력들은 조금씩 떨어진다.
'젊은 눈'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도 여러 가지다. 요미우리에서 '검객'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오가사와라 미치히로는 30대 중반으로 접어든 뒤부터 눈 관리의 소중함을 느꼈다.
그는 경기 전 인터뷰를 할 때도 카메라 플래시가 직접 눈에 닿지 않도록 최대한 피했다고 한다. 플래시로 인한 잔상이 눈에 남으면 경기 때 구종을 순간적으로 판단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뜻에서였다.
마이애미의 스즈키 이치로도 그랬다.
이치로는 어린 시절부터 동체시력을 발달시키기 위한 훈련을 계속 해왔다. 차를 타고 이동할 때조차 창밖으로 지나가는 자동차 번호판을 빠르게 읽고 숫자를 더하는 훈련을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그런 이치로도 30대 후반에 접어들자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신체적으로는 아직 젊은 선수와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지만, 시각적인 능력의 감퇴가 타격 실력의 저하로 이어지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 스즈키 이치로 / 마이애미 말린스 ]
이치로가 선택한 방법은 특수한 배팅 기계에서 고속(시속 200㎞)으로 발사되는 테니스공을 끊임없이 보는 것이다. 빠른 공에 대한 감각을 끌어 올리기 위한 훈련이다. 테니스공을 '치는' 게 아니라 '본다'는 게 중요하다.
더 정확히는, 그 공에 적힌 숫자를 읽어내는 게 진짜 훈련이다. 이 훈련은 에드가 마르티네스(전 시애틀)와 같은 메이저리그 특급 타자들이 즐겨 사용했던 방법이다.
선구안이 좋기로 이름난 텍사스 추신수도 클리블랜드 시절부터 최근까지 스프링캠프 때 이 훈련을 했다. 꾸준히 동체시력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철인'으로 유명한 한신의 가네모토 도모아키는 아예 동체시력 유지를 위해 안과 전문의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눈도 과학적으로 관리한다
송진우 KBSN스포츠 해설위원은 2009년 한화에서 은퇴한 뒤 이듬해 일본 명문구단인 요미우리 2군에서 코치 연수를 받았다. 이때 처음 본 훈련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비전 트레이닝'이다. 요미우리는 2군 숙소에 있는 트레이닝 시설에서 한 시즌에 두 번씩 선수 전원의 눈 운동 능력을 체크하고 보고서를 만들었다. 2군 숙소에 살지 않는 선수들도 훈련장으로 찾아와 검사를 받았다. 요미우리가 그만큼 선수들의 눈 관리에 철저했다는 증거다.
그때만 해도 '눈을 훈련한다'는 개념은 한국에 생소했다. 원정 이동 버스 안에서 스마트폰을 오래 사용하지 않도록 권고한다든지, 밤늦은 시간에 인터넷이나 게임을 자제하면서 선수 스스로 눈을 '보호'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한국 구단들도 점점 달라지기 시작했다. 한화는 지난해 전문 업체의 도움을 받아 개막 전과 시즌 도중에 두 차례 '스포츠 비전 스크리닝'을 실시했다. 경기할 때 사용하는 시각 기능을 측정하고 분석해 선수의 선구안이나 순간 판단 능력 등을 향상시키는 검사였다. 동체시력과 정지시력을 비롯해 총 아홉 가지 항목을 검사했다.
두산은 미야자키 스프링캠프지에 '슈프림 비전'이라는 동체시력 훈련 장비를 비치해놨다. 사용 방법은 간단하다. 선수가 기계 앞에 서서 시작 버튼을 누르면, 터치패드에 1부터 10까지의 숫자 열 개가 임의로 나타난다. 눈에 보이는 순서대로 숫자를 빠르게 누르면 한 게임이 끝난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터치패드를 찍기가 더 어려워진다.
처음에는 적응하기 힘들어했던 선수들도 점점 훈련 틈틈이 이 기계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갔다. 두산이 기대했던 효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