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경기도 판교신도시에 들어선 현대백화점 판교점 때문에 주변 상가들이 고사 위기에 처했다. 백화점이 손님을 뺏어가면서 하루 아침에 거리로 내몰리고 있다. 특히 반경 2㎞ 안에 있는 외식업체들이 큰 타격을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판교점 입점 당시 '상여 시위'까지 벌이며 "백화점이 들어서면 지역상권이 초토화될 것"이라던 상인들의 우려가 현실됐다.
거대한 '음식 백화점'
지난해 8월 문을 연 현대 판교점은 지하 6층∼지상 10층 규모로 수도권 최대를 자랑한다. 영업 면적 기준 8만7800㎡로 축구장(7140㎡) 30배에 달할 정도이다. 이전 최고기록이던 롯데백화점 소공점(7만㎡)보다 25% 더 크다. 같은 분당 상권 라이벌로 꼽히는 서현역의 AK플라자 분당점보다는 2.4배, 수내역의 롯데백화점 분당점보다는 3배나 넓다.
특히 현대 판교점은 지하 1층에 국내 최대 면적의 식품관(1만3860㎡)을 갖추고 있다. 기존 국내 최대 식품관인 신세계 센텀시티(8600㎡) 보다 1.6배 큰 규모다. 축구장 2개를 합친 것과 유사한 수준이다. 이 곳에는 뉴욕 컵케이크 전문점 ‘매그놀리아’, 대구의 명물 제과점인 ‘삼송빵집’ 등 맛집으로 소문난 108개의 식음료 브랜드가 입점해 있다. 여기에 지상 5층과 9층에도 식당가가 있다. 하나의 거대한 '음식 백화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때문에 같은 상권에 속한 AK플라자 분당점과 롯데 분당점 등 라이벌 업체들은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
지난 주말 AK플라자 분당점을 찾은 대학생 이모(27·여)씨는 "지난해 현대 판교점이 생긴 이후로 오랜만에 롯데백화점에 와 봤는데 사람들이 많이 줄어든 것 같다"며 "아무래도 먹을 것이 많은 현대백화점으로 자주 가게 된다"고 말했다.
AK플라자 관계자도 "현대 판교점 입점 이후 매출이 5% 정도 준 것이 사실"이라며 "당초 10%대의 매출 하락을 예상했는데 점차 회복세에 있다"고 말했다.
주변 식당 '초토화'
문제는 현대 판교점 주변 상가들이다. 현대 판교점 주변에는 대형 쇼핑몰이 여럿 있고 상가 또한 밀집해 있다. 이 곳 상인들은 하나 같이 "현대 판교점 오픈 이후 매출 감소가 심하다"고 토로한다.
실제 한때 판교역 최고의 쇼핑가로 인기를 모았던 '판교 아비뉴프랑'의 경우 확실히 손님이 줄어든 모습이다. 11일 오후 거리 곳곳에는 이미 폐점 한 상가를 손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영업종료' 안내문을 붙이고 문을 걸어 잠근 가게도 보였다. 같은 시간 식품관을 찾은 고객들로 발디딜 틈 없이 붐비는 현대 판교점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아비뉴프랑의 한 입점 상인은 "현대 판교점에 가면 쇼핑, 먹거리, 영화 등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이용 가능하기에 주변 상가를 이용하던 많은 이들이 백화점으로 몰려들고 있다"며 "빕스·계절밥상 등 대형 프랜차이즈는 큰 타격이 없지만 우리 같은 자영업자들은 대출 원금과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생계가 막막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 판교점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백현동 카페거리'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 곳 카페거리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이국적인 건물이 많고 브런치 카페가 집중돼 있어 젊은 고객들이 즐겨 찾았다. 하지만 식품관을 앞세운 현대 판교점이 들어선 이후 지나다니는 사람을 손에 꼽을 정도로 한적해졌다. 거리 곳곳에는 '임대문의'라고 적힌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카페거리의 A카페 점주는 “현대 판교점이 유동 인구를 모두 빨아들인 탓에 매출에 큰 타격을 입고 있다"며 "주변 상인들 역시 올해만큼 최악일 때가 없다고 하소연한다"고 말했다.
골목상권 침해 규제 '절실'
판교 골목상권 붕괴에 대해 현대백화점은 "소비자 구매 패턴이 변하면서 백화점 내 대규모 식당가 유치는 불가피하다"고 항변했다. 온라인 쇼핑과 해외 직구 등 쇼핑 채널이 다양해지면서 백화점 매장 경쟁력이 하락, 고객을 오프라인 매장으로 유인하기 위해서는 식당가 및 식품관에 공을 들일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백화점이 들어선 판교역 인근 지역에서 백화점의 경쟁력 강화와 영세한 상인들의 생존권이 충돌하고 있다.
식당 업주들은 전통시장과 슈퍼마켓 생존권을 위해 대형마트 입점을 규제하는 것처럼 적정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판교역 인근의 한 식당 점주는 "백화점에서 분식점을 운영하고 찌개도 판다. 이러면 백화점을 찾는 사람들이 식사를 위해 밖으로 나올 일이 없어진다"며 "골목상권 침해로 보이지만 지적하는 목소리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전문가들은 현대 판교점 인근 상가들의 잇따른 폐점에 대해 '예고된 참사'라는 지적이다.
판교역 인근의 한 부동산중계업자는 "앞서 현대 판교점이 들어설 경우 유동인구가 증가해 상권이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하는 이가 많았다"며 "하지만 현대 판교점은 기존 백화점들과 달리 식품관만 6000평에 달해 인근의 영세 자영업자들의 영역을 잠식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고 말했다.
또 다른 중계업자는 "현대 판교점 입점에 따라 이미 형성된 지역 골목상권의 붕괴는 어느 정도 예견됐던 일"이라며 "지금이라도 현대 판교점의 의무휴무일 지정, 판매품목 제한 등 중소 상공인들의 보호를 위한 지자체의 방안 마련이 적극적으로 추진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성남시 상권활성화팀 관계자는 "그동안 판교 지역에 대해서는 상권 붕괴 전례가 없었다. 하지만 현대 판교점이 입점한 이후 간혹 민원이 들어오고 있는 실정"이라며 "판교 상권활성화와 관련해 내년 2월까지 연구 용역을 진행하고 결과가 나오면 그에 맞는 정책을 검토할 예정이다"고 말했다.
현대백화점은 자기들 일이 아니라는 듯 무심경했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다른 상가들 사정은 정확히 알 수 없다"며 "지역상권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