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작전' 뺨 친 날치기 행정, '국제적 관례로 보면 '우선협상권'은 파기되어야" -5년에 약 375억원 조건은 받고, 그보다 더 좋은 3년에 300억 제안은 거부한 협회
1일 오후 8시30분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위치한 S빌딩.
입주사 직원들이 거의 빠져나간 시간에 30~40대로 보이는 여성들이 6층에 위치한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사무실로 발걸음을 재촉해 들어섰다.
KLPGA는 이날 밤 9시 집행부와 이사·감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긴급 이사회를 열고 최근 SBS·SBS플러스와 우선 협상을 벌였던 방송 중계권 문제를 전격적으로 통과시켰다. KLPGA의 이사회는 통상적으로 개최 1주일 전에 이사들에게 서면으로 알리는 게 원칙이다. 긴급하다고 판단되는 사안에 한해 긴급 이사회를 소집할 수 있지만 흔한 일은 아니다.
게다가 그 시간을 보면 허를 찌르는 시간이었다. KLPGA의 한 이사는 “항상 이른 아침부터 오후까지 이사회가 열렸다. 밤 9시 개최는 처음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날 긴급 이사회 개최는 ‘007 작전’을 연상케 했다. 이사회에 참석하는 임원들에게 장소와 시간에 대한 함구령을 내렸다. 건물 관리인조차 늦은 시간 회의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 관리인은 “오후 11시에 건물을 통제하기 때문에 늦은 시간 모임은 사전에 신고를 받는다. 그러나 이야기가 없었다”고 말했다.
KLPGA는 이보다 사흘 앞선 지난 7월 29일 오전 9시에 같은 장소에서 이사회를 개최하고 중계권 문제를 통과시키려 했다. 그러나 방송 중계권 업체 선정을 둘러싸고 SBS·SBS플러스와 10년 계약을 밀실에서 논의하고 있다는 본지 보도(7월 28일자)가 나가면서 계획이 뒤틀어졌다.
이사회에 참석한 한 이사는 “SBS의 조건(10년간 약 1000억원)은 KLPGA에 절대 유리한 조건이 아니었다. 계약 기간이 너무 길었고 1년에 100억원이었지만 중계제작비로 리쿱(Recoup·제작비를 모두 회수)되는 비용 30억원을 감안하면 예상보다 뚝 떨어졌다"고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는 이어 "그러나 SBS를 제외하고 다른 대안이 없다는 분위기가 형성돼 도장을 찍는 것이 기정사실로 돼 있었다.
그러다 언론에 이에 대한 보도가 나간 뒤 분위기가 바뀌었다. SBS의 제안을 거절하고 단기 계약 조건을 가져오라 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국제적인 관례의 우선 협상 계약은 통상적으로 우선 협상 기간이 남아 있더라도 한 차례 협상이 결렬되면 협상이 자동 종료된 것으로 본다.
지난 5월 중순부터 SBS와 방송 중계권 우선 협상을 벌여 온 KLPGA는 이날 긴급 이사회 전까지 총 4차례의 이사회를 개최했으나 의견 합치를 보지 못했다. 국내 대형 로펌인 법무법인 P의 K변호사는 “KLPGA가 SBS(골프)의 제안을 받지 않고 돌려보냈기 때문에 우선 협상은 결렬된 것이다. 다른 경쟁 업체도 중계권 비딩에 참여할 수 있게 된 셈”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JTBC골프와 MBC플러스가 KLPGA에 중계권 비딩에 뛰어들었다. MBC플러스는 지난달 30일 경북 경산 인터불고 골프장에서 열린 KLPGA투어 카이도 MBC여자오픈 대회장에서 강춘자 수석부회장을 만나 SBS와 우선 협상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를 강력히 항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JTBC골프는 이날 2017년 시즌부터 3년간 연 100억 조건의 제안서를 내용 증명을 받아 KLPGA로 발송했다. 앞서 KLPGA를 직접 방문해 같은 제안서를 전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KLPGA는 이날 긴급 이사회를 개최한 뒤 SBS의 손을 들어 줬다. 오후 9시 정각 임원들이 회의장에 입장한 뒤 회의실 통로 밖 유리 문까지 걸어 잠그고 시작된 긴급 이사회는 1시간 15분 만에 속전속결로 마무리됐다.
이사회에 참석한 또 다른 이사는 “일부 이사들이 SBS와 우선 협상권 종료 문제를 문의했지만 협회 김남진 국장이 나서 ‘법률적으로 (검토했지만) 전혀 문제가 없다’는 주장을 폈다. 8월 19일 종료되는 SBS와 우선 협상을 서둘러 끝내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만장일치로 결정이 났다”고 말했다.
긴급 이사회는 마무리까지 날치기였다. 긴급 이사회를 마친 이사들이 대기해 있던 취재진을 피해 문을 빠져나간 뒤 KLPGA 강춘자 수석부회장은 다시 문을 걸어 잠그고 회의장 안에서 취재 기자들과 대치했다. 한참 뒤 문을 열고 나왔지만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을 흐리고 급히 자리를 피하면서 줄달음을 치는 것으로 이날의 상황은 마무리됐다.
KLPGA는 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LPGA)투어, 일본여자프로골프협회(JLPGA)투어와 함께 3대 투어라고 자부하지만 협회 집행부는 시대에 역행하는 행정으로 큰 오점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