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아이섀도우에 립스틱을 바르고 청순가련한 척 연기하던 시대는 지났다. 내가 선택한 작품과 캐릭터를 위해서라면 민낯도 불사하는 여배우들이다.
관객들의 눈은 높아졌고 그 만큼 배우들은 똑똑해졌다. 이제 더 이상 눈에 보이는 속임수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예쁘게 보이고 싶으면 꾸밀 수 있는 작품에 출연하면 돼요. 그렇지 않은 캐릭터를 본인이 하겠다고 해 놓고 예쁜척만 하는건 모순이죠." 한 여배우의 시원한 일침에 뜨끔한 배우들도 많지 않을까.
한 동안 충무로에는 '여배우가 할 만한 시나리오가 없다', '여배우는 늘 수동적인 인물로 존재한다'는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물론 현실이다. 남배우가 펼쳐놓고 고를 수 있는 작품이 10이라면 여배우는 절반의 절반도 못 미친다. 좋은 작품 자체가 부족하고 공급이 끊어진지도 오래됐다.
그래서 여배우들은 스스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여배우는 늘 고고하고 도도하고 예뻐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깨부쉈다. 얼굴을 뒤덮은 화장을 지우고 그 속에 연기력을 입혔다.
앞서 김혜수는 영화 '차이나타운'을 통해 민낯에 뱃살까지 추가하는 파격 변신을 꾀했고, tvN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드'의 고현정은 민낯으로 감정 표현을 극대화 시키는가 하면 잡티 하나 없는 피부에 대한 부러움을 증폭시켰다. MBC '결혼전야'의 유이 역시 외모 꾸미기를 포기, 연기에 온 힘을 쏟으면서 아이돌 꼬리표를 떼어내는데 서공했다.
'예쁘다'의 기준이 모호해진 시대,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은 오히려 시선을 자극시켰고 호평이 뒤따랐다. 여배우들의 자발적 노력은 여배우를 위한 작품을 탄생케 하는데 일정 부분 이상 영향력을 행사했고, 성역도 조금씩 무너뜨리고 있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이러한 작은 발전이 언제 판도를 뒤바꿀지는 모를 일이다.
올 여름 시장 스크린에 내걸린 영화들만 봐도 그 속에서 '나 예쁘지'를 뽐낸 여배우는 단 한 명도 없다.
가장 큰 성과를 거둔 배우는 단연 손예진. 영화 '덕혜옹주'(허진호 감독)은 여배우 원톱 작품으로 여름 시장 배급을 받은 것 만으로도 괄목할 만한 성과라 여겨졌다. 하지만 누적관객수 500만 명을 돌파, 배급사도 예측하지 못했던 성적을 받았다. 이번 영화에서 손예진은 여배우로서는 다소 꺼려질 수 있는 노역 분장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허진호 감독은 이를 디테일하게 촬영했다. 스크린에 꽉 들어찬 노년의 손예진은 전혀 거부감이 없었다. 오히려 맑은 눈에서 뚝 떨어지는 눈물에 시선이 집중됐다.
손예진은 인터뷰에서 "여배우의 얼굴? 그런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다만 클로즈업이 들어갔을 때 멍한 눈을 잘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은 했다. 내가 보는데도 나 같지 않아서 좋았다"며 오로지 연기 욕심만 내비쳤다.
누적관객수 550만 명을 돌파하며 흥행 순항 중인 '터널' 속 배두나 남지현은 '미모'라고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화장 대신 눈물과 흙더미로 얼굴을 뒤덮어 그 노력을 엿보이게 했다. 오로지 작품이 좋다는 이유 만으로 비중을 따지지 않고 출연을 결정지은 배두나는 실제 조난자의 가족을 보는 듯 혼신의 열연을 펼쳐 동료배우 하정우를 감동시키기도 했다.
배두나는 "분장술로도 가능하지만 얼굴 본연의 느낌과 표정이 살아나길 바랐고 완벽하게 자연스럽길 원했다. 촬영 전 미리 울어 다크서클을 만들기도 했다"고 전해 놀라움을 자아냈다.
흙더미에 파묻혀 생김새 조차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남지현에 일부 관객들은 '남지현인줄 몰랐다'는 반응을 내비치기도 했다.
'국가대표2'(김종현 감독) 수애 오연서 역시 마찬가지다. '드레수애'라는 고정 별칭까지 있는 수애는 시종일관 단벌의 운동복에 민낯을 선보이는가 하면 지옥 훈련도 마다하지 않았다. 오연서도 브라운관 속 모습과는 사뭇 다른 매력을 뽐냈다. 과감한 숏컷 헤어부터 눈길을 사로잡았다.
오연서는 "좀 더 까맣게 보이도록 메이크업을 했다. 촬영 감독님이 계속 못 생겨 보이게 나와야하는데 예쁘게 찍힌다고 해서 그 말이 진짜인 줄 알았다. 근데 전혀 예쁘게 나오지 않았더라"며 "수애언니는 화장을 거의 안 해도 역시 예쁘더라. 다들 예쁘게 나오는데 나만 좀 이상하게 나온 것 같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목적을 달성했다는 듯 내심 흡족한 속내를 표했다.
이와 관련 한 제작사 관계자는 "HD 화면이 막 생겨났을 때, 배우들은 지레 겁을 먹고 화장에 얼굴을 감췄다. 하지만 영리한 배우들은 그것이 결코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요즘엔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보정을 원하는 배우도 많지 않다. '척'이 아니라 진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보여지길 바라고 연기력으로 승부를 보려 한다"며 "모두가 인정하는 연기력에 비주얼까지 캐릭터에 녹여내니 그 시너지 효과가 극대화 되는 것 같다"고 전했다.
거리낌없이 민낯을 내보인 여배우들의 공통적인 발언은 "예뻐 보일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많다"는 것. 레드카펫 혹은 공식석상 등 한껏 꾸며야 하는 자리가 많은 만큼 온전히 캐릭터로 살아가야 하는 작품 속에서까지 굳이 예쁨만 추구할 필요는 없다는 설명이다. 그리고 화장을 하든 안 하든 이미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고 귀띔하기도 했다.
여배우들의 이 같은 마인드 변화는 남배우들에게도 귀감이 되고 있다. 그간 비주얼에 대한 지적은 여배우들에게 더욱 꼼꼼하게 적용됐던 것이 사실. 하지만 최근 사극 속 남배우들의 헤어스타일이 눈에 거슬린다는 반응이 속속 터지고 있는 것을 보면 이제 남배우들도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연기할 수는 없게 됐다.
언제나 예쁘지만 예쁜척 하지 않아 더 예쁜 여배우들. 여자도 반할 수 밖에 없는 그녀들의 노력이 박수받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