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cky-13'이라는 문구가 적힌 빨간 모자를 쓰고 나타난 유해진(46)이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낡은 모자였지만 개봉을 앞둔 영화 '럭키'(이계벽 감독)의 제목과 개봉 날짜인 13일이 정확하게 명시돼 있어 시선을 끌었다. "10년 전부터 집에서 굴러 다니던 유물이에요. 근데 딱 맞아 떨어진거지. 요즘 부적처럼 쓰고 다녀요" 인생이 예능, 인생이 럭키한 남자다.
부적의 효염은 대단했다. 유해진이 원톱 주연으로 나선 '럭키'는 개봉하자마자 3일만에 누적관객수 100만 명을 돌파, '전우치'에 이어 역대 코미디 영화 최단기간 흥행 기록을 세웠다. "손익분기점만 넘었으면 좋겠다"는 유해진의 겸손한 바람은 빠른 시일 내 실현될 것으로 보인다.
※인터뷰 ①에서 이어집니다.
- 영화에서 '84년생'이 여러 번 강조되더라.
"개인적으로 왜 그 부분에서 관객들이 웃는지 모르겠다. 내가 서른 둘이라는게 이상한가? 농담이다. 죄송하다.(웃음)"
- 영화의 주인공으로 극중에서는 무명배우를 연기해야 했다.
"감독님이 나에게 많이 맡겨 주셨다. 감독님은 무명배우를 직접적으로 경험하지는 못하셨다. 책으로 공부하셨지. 나는 몸이 기억하는 시간들이 있다. 감독님께서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라고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 어떤 점이 비슷한다.
"배우에 도전하겠다고 마음 먹고 초반에 나오는 장면들은 거의 다 내가 직접 했던 것들이다. 볼펜끼고 연습하고 공원을 뛰고. 특히 공원은 내가 진짜 많이 갔다. 처음 배우를 시작할 때 아현동 굴레방다리 옥탑방에서 살았다. 내 집도 아니고 후배 집에 얹혀 살았다. 영화에 나오는 공간이 실제 살았던 곳과 흡사하다."
- 옛날 생각이 많이 났을 것 같다.
"계속 생각났다. 사실 돈도 없고 그런 곳에 살면서 체계적으로 연습하기는 힘들다. 아현동 일대도 그렇고 경희대 쪽에 살았을 때도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공원 밖에 없었다. 뛰어다니면서 발성 연습하고, 턱걸이 하면서 체력도 키우고. 헬스장에 갈 여유도 없었으니까."
- 연기 연습보다는 기초 체력이 더 중요한 것인가?
"일단 몸이 유연하고 가뿐해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것 같더라. 그래야 뻣뻣하거나 어색하지 않게 캐릭터를 표현할 수 있는 것 같고. 다리도 찢고 윗몸 일으키기도 열심히 했다. 그 땐 그렇게 무대포로 부딪치는 수 밖에 없었다."
- 지금도 그 근처에 가면 기억이 나겠다.
"시상식이나 큰 행사가 경희대 평화의 전당에서 치러질 때가 많다. 한 번은 시간이 남아서 매니저와 그 동네를 돌았던 적이 있다. 친구네 집에 얹혀 살다가 처음으로 독립했던 방이 그 쪽에 있었다. 골목에서도 보인다.
매니저에게 '저기가 내가 처음으로 살았던 집이야'라고 했더니 깜짝 놀라더라. 장독대 바로 밑에 있는 집인데 지금 생각해 보면 집 용도는 아닌데 나에게 세를 주신 것 같다. 14년 전, 15년 전 일이다."
-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던 때였나.
"당시 주인 할아버지가 처음엔 날 몰랐다. '무사'를 찍고 그럴 때였는데 쟤는 뭐 아침 일찍 출근하는 것 같지도 않고, 어느 날은 밤새고 들어오는데 꼬박꼬박 월세는 내니까 내심 궁금해 하셨던 것 같긴 하다.
아마 개봉이 명절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따님이 극장을 모시고 갔다 왔나 보더라. 그 때 내 직업을 알게 되셨다. '아유, 그런 것 하던 양반이었어?'라면서 반가워 하시더라."
- 함께 호흡 맞춘 이준이 이제 막 연기를 시작하는 단계 아닌가.
"영화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준과 많이 부딪치지 않는다. 서로 독립돼서 연기를 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 함께 보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마지막 부분에 합 맞추는 장면은 나쁘지 않았다."
- 연기 조언도 해줬나.
"연기에 대한 태도 자체가 좋은 친구다. 원래 조언을 잘 안 하기도 하지만 특별히 할 것은 없었다. 계산기 두드려서 딱 나오는 것이 연기면 나도 참 좋겠다. 그래서 '이건 이렇게 해야 3이 나오지'라고 얘기해 줄 수도 없다. 다만 많이 생각하고 마구 생각하라는 말은 해줬다."
- 직언보다는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인 것 같다.
"'그렇게 하면 좋을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떻니?'라고 제안을 한다. 연기에 답은 없다. 상대방 생각이 맞을 때가 있고 내 생각이 맞을 때가 있다. 그 절충안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최대한 효과적으로 나오면 좋으니까."
- '럭키' 메시지와도 닮아있다.
"결과적으로 하찮은 삶은 없지 않나 싶다. 예전에 연극을 하다 보면 선배들이 무지하게 혼냈다. 엄했으니까. 그러다 술 한잔 하면서 그런 얘기를 한다. '야! 하찮은 배우는 있어도 하찮은 배역은 없는거야, 이 자식아!' 그러면 '맞습니다. 선배님.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면서 울었다. 그 시대에만 느낄 수 있었던 재미다."
- 유해진이 아니었다면 재미없었을 것이라는 평도 있는데.
"상황이 주는 코미디를 좋아하고 쉬운 말장난은 싫어한다. 요즘 아재개그가 유행하는데 이번 영화에서는 최대한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다. 만약 아재개그를 남발했다면 나도 관객도 재미없어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 중심은 지키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