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현(45) LG 주루코치는 평소 차분하다. 하지만 19일 그의 목소리 톤은 높았다. 2016년 포스트시즌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후배 선수들이 마냥 대견하다. 부담을 이겨내고 최선의 결과를 얻어낸 경험이 '제2의 전성기'을 맞이하는 힘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유지현 코치는 LG의 영광과 쇠퇴를 모두 경험한 인물이다. 1994년 입단한 그는 서용빈(LG 타격코치), 김재현(전 한화 타격코치)과 함께 '신인 3총사'로 불렸다. 타석에선 공격의 선봉장을 맡았고, 수비에선 해태의 이종범과 함께 김재박(KBO 경기감독관), 류중일(전 삼성 감독)의 계보를 잇는 명 유격수로 평가받았다.
입단 첫 해부터 LG의 한국시리즈 우승 주역이 됐다. 이후 5번 더 LG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끌었다. LG의 마지막 한국시리즈 진출이던 2002년에 유 코치는 팀의 주장이었다. 2004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한 그는 이듬해도 LG 유니폼을 입었다. 주루 코치로 지도자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07~2008년엔 자비로 미국 시애틀로 야구 연수를 떠났다. 그리고 2009년부터 LG 코치로 복귀했다.
현역 시절 말년부터 LG는 암흑기를 걸었다. 2003년부터 2012년까지 10시즌 연속으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한결같이 잠실벌을 지켜온 유 코치이기에 그 어느 해보다 뜨거운 2016년 가을이 남다르다. 그에게 "1994년과 2016년을 비교해달라"고 물었다. 유 코치는 "1994년 가을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고 답했다.
닮은 점은 팀 구성. 올 시즌 LG는 20대 초·중반 젊은 선수들의 성장세가 두드러진다. 박용택, 정성훈 등 베테랑 타자들이 중심을 잡고, 젊은 선수들이 패기와 활력을 더했다. 1994년에도 그랬다. 당시 한국시리즈 엔트리에는 신인 선수가 5명이나 포함됐다. '신인 3총사'와 함께 데뷔 첫 해 10승을 거둔 투수 인현배, 내야수 허문회도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다. 유 코치는 "신인 선수가 많아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그저 선배들을 따라가면 됐다. 야수진엔 김영직, 한대화 선배가 있었고 투수진에선 김용수, 정상흠 선배가 워낙 든든한 기둥 역할을 해줬다"고 말했다. 이어 "'그라운드에서 할 수 있는 것만 열심히 하자'라는 생각을 했다. 부담도 크지 않았다. 서로 조화를 이뤘기 때문에 우승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회상했다.
지금 LG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준PO 3차전 결승 홈런 주인공 유강남은 "정성훈 선배가 앞 타석에서 초구를 놓친 것에 대해서 반성하게 되는 조언을 했다. 그래서 더 과감하게 플레이를 한 게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고 했다. 정성훈은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됐지만, 이날 승리에 숨은 공신이었다. 투수 이동현도 "작은 부분이라도 내가 한 경험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믿어 후배들에게 얘기를 해준다"고 했다. 우승을 거뒀던 1994년처럼 신·구 조화가 이뤄지고 있다.
포스트시즌 대진운은 1994년보다 2002년에 가깝다고 한다. LG는 1994년 정규시즌에서 2위 태평양에 11.5경기 차 앞서며 압도적으로 1위를 차지했다. 한국시리즈에 직행해 올라오는 팀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 코치는 "전력 면에선 단연 우리 팀이 더 좋았다. 올해 두산과 비슷했다. 언론의 평가도 그랬다. 물론 1차전에 대한 부담은 있었다"고 말했다.
1994년 한국시리즈 1차전은 LG 이상훈과 태평양 김홍집의 명 투수전이었다. 9회말까지 스코어는 1-1. 연장 11회까지 간 승부는 무명의 김선진이 김홍집의 141구째를 좌월 결승 홈런으로 때려내며 마무리됐다.
유 코치는 "김선진 선배의 끝내기 홈런으로 이긴 뒤에는 자신감이 더 커졌던 것 같다. 와일드카드(WC) 결정전부터 시작한 올해와 직접 비교는 어렵다. 오히려 준플레이오프(PO)부터 시작해 현대와 KIA를 차례로 꺾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삼성과 대등한 경기를 펼친 2002년과 흡사한 것 같다"고 했다.
유 코치는 "포스트시즌 한 경기에서 소모하는 에너지는 정규시즌 열 경기 분"이라고 했다. LG는 벌써 6경기를 치렀다. 선수들의 체력과 정신적 소모가 얼마나 큰지 잘 안다. 하지만 하늘을 찌를듯한 기세는 WC 결정전에서 만들어졌다고 봤다. 유 코치는 "한 경기로 탈락이 결정되는 상황을 맞이하면서 압박감을 다스리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잘 극복한 뒤엔 선수들의 표정부터 달라졌다. 준PO는 상대적으로 자신감이 커진 채 맞이했다. PO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말했다.
유 코치는 우승이라는 달콤한 결실을 맛봤다. 특히 프로 무대에서의 느낀 그것은 아마 시절과는 달랐다고 한다. "6개월이라는 정규시즌 일정에서 팀도, 선수도 부침을 겼는다. 이를 극복하면서 얻은 결과였다. 그저 '기분이 좋다'는 느낌이 아니다. 왜 눈물이 나는지를 알게 된다. 후배들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LG는 올해 1994년의 영광을 재연할 수 있을까. 쉽지는 않다. 포스트시즌에선 위로 올라갈수록 더 강한 팀을 만나야 한다. 하지만 우승에 실패하더라도 얻는 게 더 크다고 본다. 선수단과 코칭스태프가 2016년을 어떻게 보냈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유 코치는 "올해는 우리 LG에게 정말 힘든 시즌이었다. 다른 해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그러나 선수들과 코칭스태프가 하나가 됐다. 어려움을 이겨내고, 가을 야구를 뜨겁게 만들었던 이 경험이 향후 5년 이상, 팀이 발전하는 힘이 될 것이다"고 힘주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