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야구는 해마다 특유의 색깔이 있다. 올해 가을은 투수들의 포스트시즌이었다. 와일드카드(WC) 결정전부터 한국시리즈(KS)까지 투수의 우위가 두드러졌다. 정규 시즌이 기록적인 타고투저 양상을 보였기에 더욱 주목을 받은 현상이다.
2016년 정규 시즌은 역대 최고의 타고투저였다. 리그 평균 타율은 역대 최고인 0.290였다. 경기당 득점(11.21점)도 최다였다. 규정타석을 채운 타자 55명의 평균 타율은 0.312. 좋은 타자의 기준이라는 '3할 타율'의 가치도 크데 떨어졌다. 홈런 30개를 넘긴 타자도 7명이다. 이 때문에 현장에선 "마운드 높이를 올리자"(양상문 LG 감독)는 등 투수에게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포스트시즌(PO)에선 달랐다. 첫 관문인 WC 2경기에서 KIA는 4득점, LG는 3득점에 그쳤다. 경기당 득점은 WC 결정전이 3.5점, 준플레이오프(준PO)가 6.8점, 그리고 PO는 시리즈 최저치인 5.3점에 그쳤다. KS에선 NC가 4경기에서 딱 2점만 내는 극심한 타격 난조 끝에 경기당 5.5점이 나왔다. 포스트시즌 전체 경기당 득점과 같은 수치다. 전체 14경기 중 완봉승만 다섯 번 나왔다. 두산은 역대 KS 최저 평균자책점(0.47)과 최소 실점(2점) 기록을 새로 썼다.
긴장감 넘치는 투수전이 펼쳐졌고, 각 팀은 세밀한 작전 야구로 대응했다. 정규 시즌 난타전과 긴 경기 시간에 익숙해진 팬들에겐 새로운 묘미였다. 그러나 KS까지 배트가 맥을 못 추자 볼멘소리도 나왔다. PO에서 LG, KS에서 NC 타선은 무기력 그 자체였다. 한 타자 출신 프로야구 코치는 "졸전"이라고 평했다.
포스트시즌은 타격전보다는 투수전 성격이 강하다. 2014~2015년 정규 시즌 리그 전체 WAR(대체선수대비승리기여)에서 투수가 차지하는 비중은 45.9%였다. 그러나 포스트시즌에선 70.7%로 상승했다. 상위권 팀에서 가장 좋은 투수들이 차례로 등판한다. 전력 분석도 더욱 세밀해진다. 메이저리그 강타자 미키 맨틀은 그래서 "월드시리즈에선 투수력의 비중이 90%"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올해 정규 시즌에서 타고투저가 절정에 달했다는 점에서 포스트시즌의 투고타저는 이례적이다. 과거 타고투저 시즌에는 그렇지 않았다. 경기당 득점에서 역대 2위 타고투저 시즌은 2014년(11.19점)이었다. 리그 평균 타율도 역대 2위인 0.289. 장타율은(0.443)은 역대 1위였다. 3할 타자는 36명. 특히 웨이트트레이닝 강도를 높인 넥센 타자들은 팀 홈런만 199개를 기록하며 '공격 야구' 대표 주자가 됐다.
포스트시즌에서도 타고투저였다. 14경기 평균 득점은 9.36점이었다. 정규 리그 평균 득점(11.19점)보다 낮지만 올해보단 훨씬 높았다. 한 팀이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한 경기도 네 번 있었다. LG와 NC가 붙은 준PO 1차전부터 화끈한 타격전이었다. 정규 시즌 타율 0.214에 불과한 LG 포수 최경철이 1회부터 NC 외국인 투수 크리스 웨버를 상대로 스리런 홈런을 때려 내며 기선을 제압했다. LG는 이 경기에서 13-4로 이겼다. 이날 두 팀의 안타 수 합계는 26안타. 올 시즌 NC가 KS 4경기에서 기록한 안타 수(24개)보다 많다.
PO도 같은 양상이었다. 정규 시즌 2위 넥센이 경기당 9안타를 치며 LG에 한 수 앞선 공격력을 보여 줬다. 홈런도 4경기에서 5개나 때려 냈다. 시리즈 전적은 3승1패 넥센 승리. 하지만 LG도 2차전에서 8회초에만 8득점을 올리는 등 공격 집중력을 보여 줬다. 경기당 득점은 10.5점. 올 시즌 두 팀의 매치업인 준PO 평균 득점은 6.75점에 불과했다. 넥센이 목동구장에서 고척돔으로 이전했다는 변수는 있지만 차이가 너무 크다.
2000년 이전, 가장 타고투저가 두드러졌던 1999년도 마찬가지였다. 정규 시즌 평균 타율 0.276, 평균 득점 10.77점 모두 당시 역대 최고 기록이었다. 그해는 양대리그제오 각 리그 1·2위가 교차로 맞붙어 PO를 치렀다. 매직리그 1위 삼성과 드림리그 2위 롯데가 치른 PO 한 축은 7차전까지 갔다. 두 팀 합계 24홈런이 터진 화력전이었다. 5~7차전 모두 각각 5득점 이상 올리기도 했다. 그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한화도 매직팀 2위 두산과 PO 4경기에서 홈런만 7개를 때려 내며 4승을 거뒀다. 4경기 평균 득점은 9.25점을 기록했다.
올해는 왜 달랐을까. 이유는 단순했다. 선발투수들이 대체로 호투를 펼쳤다. 14경기에서 퀄리티스타트가 16번 나왔다. 정규 시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투수 대부분이 가을 야구 마운드를 밟았다. 투수 부문 WAR(대체선수대비승리기여) 순위 상위 10명 중 메릴 켈리(SK)와 라이언 피어밴드(kt)를 제외한 8명이 포스트시즌에 출장했다. 평균자책점 부문 5걸 중 4명, 13승 이상 기록한 7명 전원도 마찬가지다.
특히 외국인 투수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와일드카드 1차전에서 맞붙은 KIA 헥터 노에시와 LG 데이비드 허프는 각각 7이닝 1자책과 7이닝 2자책을 기록했다. 넥센 앤디 밴 헤켄은 준PO 2차전에서 7⅔이닝 1실점을 기록하며 팀의 5-1 승리를 이끌었다. 팀의 포스트시즌 유일한 승리를 선사했다.
외인 투수 맞대결이던 NC와 LG의 PO 1·2차전도 투수전이었다. 1차전 LG 선발 헨리 소사는 6⅓이닝 무실점, NC 에릭 해커 7이닝 2실점을 기록했다. 2차전에선 LG 허프가 7이닝 2실점, NC 재크 스튜어트는 7⅓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2연승을 거둔 NC는 그저 LG 타선보다 결정적인 순간에 집중력이 좋았을 뿐이다.
두산의 정규 시즌 우승을 이끈 니퍼트와 마이클 보우덴은 한국시리즈에서도 강했다. NC 중심타선을 농락했다. 니퍼트는 1차전에서 8이닝 무실점, 보우덴은 3차전에서 7⅔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반면 각 팀 간판타자들은 기대에 못 미쳤다. LG 타선 대들보 박용택은 PO에서 17타석 만에 첫 안타를 쳤다. 두산 선발진 대항마로 전망된 나성범, 에릭 테임즈, 이호준, 박석민도 KS에서 모두 1할 타율에 그쳤다. 테임즈의 홈런포는 4차전 9회말, 0-8으로 뒤진 상황에서야 나왔다.
결국 올해 포스트시즌의 이변은 외국인 투수가 주도했다. 10구단 체제가 되면서 1군 투수들은 양적으로 늘어났지만, 질적으로 하락했다. 수준급 외국인 투수에 대한 수요가 더 커졌고, 몸값은 올라만 간다. 외국인 투수 몸값은 200만 달러 선을 넘었다. 양극화도 심화됐다. 타자들이 타율이 높아질 수 있던 이유다. 내국인 투수, 특히 선발 자원이 사라지고 있다는 건 최근 한국 프로야구가 안고 있는 문제다. 김인식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감독도 이 점을 가장 큰 문제로 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