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열린 2016 KBO 시상식. 스포트라이트는 MVP 더스틴 니퍼트(두산)와 신인왕 신재영(넥센)에게 쏠렸다. 그러나 홀드 타이틀 수상을 위해 참석한 이보근(30·넥센)도 또 다른 주인공이었다. 다른 선수들이 눈물을 흘리며 감격을 토로할 때, 홀로 동그란 눈을 빛내며 손에 쥔 트로피를 이리 보고 저리 봤다. 데뷔 11년 만에 처음 상을 받은 30대 투수의 순진무구한 모습에 시상식장에는 웃음이 터졌다.
그 후로 사흘이 지난 17일. 다시 만난 이보근은 여전히 "아직도 축하 인사가 어색하기만 하다"며 쑥스러워했다. "홀드 1위를 했어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시상식에 가보니 왜 다들 상을 받고 싶어하는지 알겠더라"고 말했다. 고기도 그 맛을 아는 사람이 다시 먹는 법. 이제 '홀드왕' 이보근에게는 그동안 몰랐던 새 세상이 열렸다. 그리고 그 영광을 뒤로한 채 또 다른 트로피를 향한 담금질을 시작했다. 인터뷰 도중 이보근은 자주 웃었다.
-지난 시상식에서 화제를 낳았다.
"주변 사람들이 다들 수상 소감 얘기를 많이 하더라. 왜 트로피에서 눈을 못 떼냐면서.(웃음) 그런데 정말 신기한 걸 어쩌나. 데뷔하고 처음 받는 상이라 더 그랬던 것 같다. 집에 와서 트로피를 눈에 잘 보이는 곳에다 올려놨다."
-그 정도로 실감이 안 났나.
"홀드왕이라고 했어도 시상식 당일 아침까지 아무 기분도 못 느꼈다. 그런데 시상식장에 딱 도착하니까 '아, 내가 상을 받긴 받는구나' 싶더라. 사람도 많고, 카메라도 많고, 분위기도 다르고. 그러다 내 이름이 불리고 단상 위에 올라갔는데, 다들 나를 쳐다보고 있으니 얼마나 쑥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래도 상을 받아보니까 왜 다들 상을 받고 싶어하는지 알겠다. 솔직히 또 받고 싶다(웃음)."
-수상 소감에서 가족 얘기를 많이 했다. 가족들 반응은?
"집에서는 소감을 떠나 내가 그런 시상식에 간 것 자체를 좋아했다. 어머니는 눈물도 많이 났다고 하시더라. 부모님은 지방에 계셔서 모시지 못했고, 아내는 둘째를 임신 중이라 나 혼자 참석했다."
-2005년 프로에 입단했지만, 지난 10년간 '유망주'라는 얘기만 들었던 게 사실이다.
"(잠시 한숨을 쉰 뒤) 야구가 참 될 듯 말 듯 잘 안 됐다. 스트레스만 많이 받았다. 그래도 2011년까지는 꾸준히 게임을 나갔는데, 군입대 전 2년(2013·2014년) 동안은 특히 고생을 많이 해서 더 힘들었다. 어깨도 많이 아팠고, 무엇보다 내가 많이 부족했다."
-군복무 기간에 많이 달라진 건가.
"몸도 마음도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내가 안에서 야구를 할 땐 못 느끼던 부분을 밖에 나가서 제 3자 입장에서 들여다보고 고민했다. 그랬더니 많은 것이 보이고, 무엇이 문제였는지도 뒤늦게 생각이 났다."
-정신적인 변화가 가장 컸던 것 같다.
"정말 그렇다. 처음에는 막연하게 '복귀할 때를 대비해 준비를 잘 해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그런데 2014년 8월 쯤에 아내가 이런 얘기를 했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 줄 아느냐'고. 그 얘기를 듣고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전의 나는 진짜 부정적이었고, 항상 잘 안 되는 것들만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그 후에 주위를 둘러 보니 많은 게 달라 보였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고 준비를 시작했다. 때마침 이지풍 트레이닝 코치님께 연락이 와서 몸을 만드는 데 도움을 많이 받았다. 주위에서도 그때 '열심히 잘 하고 있다'는 얘기를 많이 했다."
-아내는 무심히 던진 얘기였을까.
"그렇지 않다. 같은 얘기를 이미 몇 번 했다고 하더라. 그런데 그 전엔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갑자기 확 와닿은 거다. 생각이 바뀔 준비가 돼 있었나 보다."
-생각이 바뀌니 위치도 달라졌다. 필승조로 시즌을 시작했다.
"마무리 캠프에 잠깐 참가했을 때 코칭스태프께서 '많이 달라졌다', '좋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확실히 내게 중요한 임무가 주어졌다고 생각하니, 어떻게든 잘 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더 굳게 마음을 먹고 준비했다."
-그래도 고비는 분명히 있었을 텐데.
"수시로 찾아왔다.(웃음) 내가 점수를 자주 주지는 않는데, 한 번 줄 때 3점, 4점씩 몰아서 주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평균자책점이 자꾸 올라간다. 그런 날은 주변에 '류현진 할아버지가 와도 안 될 것 같다'고 말하곤 했다. 그런 경기를 줄이고 싶다."
-그래도 결국엔 홀드왕에 오르지 않았나.
"팀이 이길 수 있는 기회는 꼭 지키고 싶었다. 3점 차면 2점을 주고 막고, 2점 차면 1점을 주고 막았다. 리드는 어떻게든 지키려고 애썼다. 마운드를 내려가면 손혁 투수코치님이 '동점 안 줬잖아. 그럼 됐어'라고 말해주시곤 했다. 운이 좋았다.(웃음)"
-'홀드왕'이라는 목표도 원동력이 됐나.
"처음에는 홀드 몇 개를 해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다. 처음으로 10홀드를 찍고 나서야 스스로 '20~25홀드 정도만 하면 좋겠다'는 목표치를 설정했다. 그때만 해도 홀드 타이틀 역시 생각도 해본 적 없다. 그저 앞만 보고 갔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냥 30홀드를 목표로 할 걸 그랬다. 여름쯤 경기가 잘 안 풀리고 홀드 기회가 잘 안 올 때, 아내가 내게 '욕심 없이 딱 25홀드만 했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실제로 딱 25홀드를 하고 난 뒤 희한하게도 한 달 동안 홀드를 추가하지 못하고 시즌을 끝냈다.(웃음)"
-그렇다면 내년엔 30홀드에 도전?
"(두 손을 내저으며) 아, 정말 아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은 안 하고, 어떻게든 몸을 잘 만들어서 준비하겠다는 생각만 한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다. 사실 그동안 욕심을 부려서 잘 됐던 적이 없다. 20대 때는 의욕이 넘쳤다. 남들이 무리라고 하는데도 3이닝 던지고 다음 날 또 던지겠다고 자청하기도 했다. 잘 하고 싶어서 욕심을 부렸던 건데, 결과적으로 잘 안 됐다. 욕심 부리면 자꾸 다른 생각이 끼어든다. 그러면 안 된다."
-올해는 기대를 뛰어 넘어서 박수를 받았다. 내년엔 기대치가 훨씬 더 높아질 것이다.
"잘 알고 있다. 나도 그렇고, 마무리 김세현도 그렇고, 내년에는 우릴 쳐다보는 시선이 올해와는 다를 것이다. 차라리 올해는 모두가 반신반의하고 도전하는 입장이라 마음이 편했다. 내년에는 입장이 달라서 야구를 못하면 그만큼 욕도 더 먹을 것 같다. 우선은 올해처럼 내년에도 풀타임을 던지겠다는 생각으로 임할 것이다. 또 다른 셋업맨 한현희도 돌아오고, 올해 같이 잘 했던 김상수도 있으니, 팀 내에서도 선의의 경쟁을 펼치면서 발전할 것 같다."
-올해 많은 걸 이뤘다. 다음 시즌엔 무엇을 꼭 이루면 좋을까.
"준플레이오프에서 LG에 진 뒤 너무 허무했다. 화도 치밀었다. 포스트시즌 등판이 처음이라 더 그랬던 것 같다. 4차전 7회를 던지고 내려오면서 '진짜 오늘이 마지막만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날 정도였다. 그때 이렇게 생각했다. 내년에도 가을 야구를 하게 되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내고 싶지는 않다고."
-또 한 번 상을 받아도 좋겠다. 내년에는 둘째도 태어나니까.
"사실 시상식 끝나고 집에 가서 현관문을 열었더니, 아내가 나를 보자마자 눈물부터 흘렸다. '그동안 고생하면서 내조해준 결실이다' 하면서 트로피를 안겨줬다. 20대 어린 시절에 나를 만나서 내가 고생하는 모습을 다 봤다. 그래서 더 울컥했던 것 같다. 아무래도 내년에 아내를 또 울려야겠다. 이렇게 (좋은 일로) 울리니까, 울려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