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 리그에서 감독들은 불펜 투수에게 더 많이 의존한다. 올해 메이저리그에서 불펜 투수는 경기당 3.3이닝을 책임졌다. KBO 리그에선 3.8이닝이다. 구원투수의 투입과 강판 시점, 연투와 휴식 등은 감독이 결정한다. 효과적이면서도 '건강한' 불펜을 운영해야 하는 감독의 업무는 더 막중해졌다.
불펜 운용의 효과성을 보여 주는 고전적인 지표는 세이브, 블론 세이브, 홀드 등이다. 하지만 이 지표들에는 결점이 몇 가지 있다. 세이브는 경기 내용을 고려하지 않는다. 9회 1점 차 무사 만루에 등판해 무실점으로 막은 세이브와 3점 차에 등판해 2점을 주고 거둔 세이브도 똑같이 취급된다. 마무리 투수 앞에 등판하는 계투 요원들의 실적도 고려되지 않는다. 홀드라는 대체재가 있지만 세이브처럼 경기 상황에 대한 고려는 없다.
그래서 수년 전 미국 야구 연구가 사이에서 등장한 지표가 '셧다운(Shutdown·SD)'과 '멜트다운(Meltdown·MD)'이다. 투수가 등판해 팀의 기대승률(WE·Win Expectancy)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따진다. 등판 시점의 기대승률과 강판 시점의 기대승률의 차이가 '추가한 기대승률(WPA)'이다. 어려운 상황에서 이닝을 잘 막을수록 WPA는 커진다.고전적인 세이브나 홀드가 갖지 못하는 장점이다.
올 시즌 KBO 리그 불펜을 셧다운과 멜트다운으로 살펴봤다. 흥미로운 사실들이 발견된다. 단, 지표의 기준은 변경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WPA가 +0.06 이상이면 셧다운, -0.06 이하면 멜트다운이 기록된다. 0.06, 즉 6% 차이는 3점 차 경기 막판 1이닝 혹은 2이닝을 구원투수가 혼자 막아 냈을 때 WPA의 평균치다. 하지만 최근 메이저리그는 투고타저인 반면 KBO 리그는 타고투저다. 메이저리그 기준으론 안정적인 리드도 KBO 리그에선 불안하다. 같은 상황에서도 KBO 리그 팀의 기대승률은 메이저리그보다 낮다. 이를 고려해 KBO 리그에선 셧다운을 +0.04 이상, 멜트다운을 -0.08 이하로 설정했다.
▶ 최고 구원투수는 SK 박희수
SD 개수가 얼마나 자주 공적을 세웠는지를 말해 준다면, SD/MD 비율은 불펜 투수의 ‘안정감’을 보여 준다. MD가 적은 투수는 그만큼 팀에 피해를 끼친 횟수가 적다. SD/MD 수치도 높게 나타난다.
올해 KBO 리그에서 SD/MD 비율이 가장 좋았던 투수는 '투심 스페셜리스트'인 SK 박희수였다. 박희수는 SD 30개를 기록하는 동안 MD 경기는 딱 5차례였다. 비율은 6.0으로 SD 20개 이상 구원투수 중 가장 높았다. 박희수보다 SD가 더 많았던 LG 임정우는 MD 13회로 안정감에서 떨어졌다.
박희수와 같은 SD/MD 비율을 기록한 투수가 있다. SK 후배 김주한(12SD·2MD)이다. 왼손 타자를 체인지업으로 잡을 수 있는 사이드암 투수다. 시즌 중반 샛별같이 나타나 LG 마운드의 버팀목이 된 김지용도 21SD·5MD로 비율 4.2를 기록했다.
▶ 정우람의 진가는 세이브 숫자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세이브 8위(16개)에 그친 한화 정우람은 SD 순위에서는 6위(28개)에 올랐다. 세이브 상황은 아니지만 중요한 상황에 자주 등판해 불을 껐다. 경기 후반 접전에서 많은 이닝을 소화했다는 의미다. 6월 5일 대구 삼성전이 대표적이다. 정우람은 8회말 4-4에서 등판해 10회까지 3이닝을 1실점으로 막았다. 이 경기에서 기록한 WPA는 0.335였다. 팀 기대승률이 66.5%일 때 등판해 100%, 즉 승리가 확정될 때까지 마운드를 지켰다. 올 시즌 구원투수 중 가장 높은 WAR(대체선수대비승리기여) 3.26을 기록하기도 했다.
▶ 권혁의 노고는 SD 숫자에서 드러난다.
한화 권혁은 13홀드로 이 부문 10위였다. 그러나 66경기에서 95⅓이닝을 던진 그는 올해 KBO 리그에서 가장 고된 일을 했던 투수다. 6승 3세이브 13홀드는 그의 노고를 표현하기에 부족하다. 하지만 SD는 보여 준다. 넥센 김세현과 SD 공동 4위(29개)에 올랐다. 팀 내 1위다. 29SD는 건실한 피칭으로 팀 승리를 위한 발판을 마련해 놓고 마운드에서 내려갔다는 증거다.
▶ 한화 불펜 운용은 마구잡이였다.
권혁의 SD 개수가 자랑스러운 훈장이라면, MD 개수는 슬픈 자화상과 같다. 권혁은 29SD을 기록하는 동안 MD도 무려 16번 기록했다. 16MD는 전체 구원투수 중 네 번째로 많다. 한화에는 권혁보다 더 많은 MD를 기록한 투수도 있다. NC 김진성, 롯데 윤길현과 같은 18MD의 박정진이다.
29번 SD는 권혁이 충분한 경쟁력이 있는 불펜 투수임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는 너무 자주, 많이 던졌다. 과부하가 걸리자 막을 수 있는 점수를 막아 내기가 어려워졌다. 7월 이후 권혁은 3SD와 5MD를 기록했다. 지쳤다는 증거다.
박정진은 올 시즌 19SD·18MD를 기록했다. 18MD는 성적이 심각하게 나쁜데도 중요한 상황에 자주 기용됐다는 뜻이다. 휴식이 필요했지만 박정진은 올해 77경기에 나서 84이닝을 던져야 했다. 평균자책점은 5.57이다. 김성근 감독은 대체 왜 박정진 등판을 고집했을까. 이유는 몰라도 결과는 확실한 실패였다.
▶ 후반기 임정우는 ‘진짜’였다.
임정우는 전반기 LG 팬들의 성토 대상이었다. 6월에 11경기 평균자책점 12.10으로 부진하자 비난의 수위는 더 높아졌다. 6월 14일 잠실 NC전에서는 아웃 카운트 하나도 잡지 못하고 안타-안타-안타-볼넷을 만들며 교체됐다. 6월 SD는 3개에 그친 반면 MD는 5개였다.
무너지는가 싶었던 임정우는 올스타전을 기점으로 다시 살아났다. 후반기 SD는 16개였고, MD는 딱 두 개였다. 난공불락, 철옹성이 따로 없었다. 다른 기록에서도 그의 후반기 호투가 확인된다. 전반기 5.08이던 평균자책점은 후반기 2.27로 급격히 호전됐다.
▶ 롯데의 FA 불펜 영입은 실패?
롯데는 2015시즌 뒤 마무리 투수 손승락과 중간계투 윤길현을 각각 총액 60억원과 38억원에 영입했다. 하지만 SD와 MD로 살펴본 두 투수의 영입은 적어도 올해는 실패작이었다.
손승락은 24SD·10MD을 기록했다. 등판 횟수(48경기)가 적은 탓에 SD 숫자도 적다. 평균자책점도 4.26으로 만족스럽지 않다. 하지만 이적 동기 윤길현에 비하면 양반이다.
윤길현은 SD 20개를 기록하는 동안 리그 최다인 18MD을 쌓아 올렸다. 말 그대로 ‘멜트다운'. 마운드 위에서 후쿠시마의 원자로 노심처럼 녹아내렸다. 평균자책점은 6.00으로 치솟았다. 50이닝 이상 던진 구원투수 중 삼성 백정현(6.02)에 이어 두 번째로 나쁘다. KBO 리그의 '고가 불펜 FA' 현상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
▶ 불안했던 ‘뱀직구’와 ‘로켓’
MD로 울상이 된 팀은 롯데뿐만이 아니었다. KIA는 지난겨울 삼성에서 방출된 임창용을 영입했다. 징계로 72경기 등판이 불가능했지만 후반기 팀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믿었다.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임창용의 SD는 13개에 그쳤고, MD는 9개였다. 15세이브와 6블론 세이브는 KIA가 기대한 임창용의 기록이 아니었다.
LG에 세 번이나 팔꿈치 인대를 바친 이동현도 FA 계약 첫해인 올해 성적이 좋지 않았다. SD(11개)보다 MD(14개)가 더 많았다. 지난해엔 16SD·8MD, 2014년엔 27SD·8MD였다. LG는 프랜차이즈 스타를 3년 붙잡는 데 성공했지만 성적은 얻지 못했다.
▶ 숨은 진주, 채병용·윤명준·이정민
SD와 MD는 기존 세이브나 홀드로는 저평가된 선수를 발견할 수 있다는 유용함이 있다. SK 채병용, 두산 윤명준, 롯데 이정민은 그렇게 많은 주목을 받은 투수는 아니다. 홀드 순위에서도 윤명준이 공동 14위, 채병용과 이정민은 공동 19위였다. 세이브는 세 투수 모두 2개씩에 그쳤다.
하지만 SD와 MD에서는 이들의 팀 공헌도와 진가가 드러난다. 채병용은 26SD·9MD, 윤명준은 19SD·7MD, 이정민은 18SD·7MD를 기록했다. SD/MD 비율로 안정감을 평가한다면, LG 임정우(2.5), 두산 이현승(2.1)보다 나았다. 특히 이정민은 구원투수 WAR이 2.37로 전체 6위였다. NC 원종현, LG 임정우, SK 박희수보다 나았다.
▶ 그런데, 오승환은 어땠을까?
KBO 리그 역사상 최고 구원투수는 오승환이다. 2010년 이후로 한정할 때 오승환은 SD와 MD에서 가장 탁월한 투수였다. 삼성 소속이던 2011년 오승환은 셧다운 38회를 기록했다. 2010년 이후 시즌 최다 기록이다. 개수로는 2011년 정우람(37SD), 2012년 박희수(36SD), 2014년 한현희(36SD), 2015년 조상우(34SD)도 오승환과 견줄 만하다. 하지만 2011년 오승환이 기록한 MD는 딱 한 번뿐이었다. 다른 네 투수는 개인 최다 SD를 기록한 시즌에 모두 10개가 넘는 MD를 기록했다. 진짜 '끝판왕'인 셈이다.
박기태(야구공작소)
야구 콘텐트, 리서치, 담론을 나누러 모인 사람들. 야구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공유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