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게이트는 체육특기생 입시 비리 논란으로 시작됐다. 지금까지 밝혀진 비리의 주된 무대도 '올림픽 대비'를 빙자한 체육계였다. 멀리는 일제강점기부터 국민적 자긍심의 원천이었던 우리 체육계가 한순간에 국민의 수치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한 가지 질문을 제기해 보자. 왜 하필이면 문화체육계였을까?
문화계에 대해서는 비교적 쉽게 설명이 가능하다. 창조적인 작업의 특성상 '계산 가능성'에는 한계가 있다. 그만큼 편법이 끼어들 여지가 많다. 하지만 체육계는? 근대 스포츠가 출현한 지난 200여 년 이래 체육계야말로 가장 빠르게 합리화를 이뤄 온 분야 중 하나가 아닌가? 이 합리화된 영역 어느 곳에 빈틈이 생겨 최순실이 끼어들게 되었을까?
여기에서 우리 체육계의 근본적인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지난 반세기 가까이 우리 체육계에 쌓여 온 적폐, 그 중심에는 누차 지적돼 온 국가주의와 권위주의의 쌍이 자리하고 있다.
먼저 국가주의. 박정희 독재 정권 이래 우리 체육은 오로지 국위 선양의 도구, 좀 더 정확히는 독재 정권 정당화의 도구로 사용돼 왔다. 그리고 국가가 체육의 전면에 나서면서, 체육을 즐기는 개인의 행복은 철저히 무시했다.
공부를 하지 못하고 친구를 사귀지 못해도 국제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만 내면 그만이었다. 성장 과정에서 운동선수들은 체육부라는 '섬'에 고립되었고 운 좋게 국가대표 선수가 되면 태릉선수촌에 유폐된 채 가혹한 훈련을 견뎌야 했다. 오로지 운동 능력만으로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만든 체육특기자 제도는 이런 국가주의의 자연스러운 부산물이었다. 최순실은 그 틈을 파고들어 중·고등학교 내내 거의 수업에 참여하지 않은 자신의 딸을 대학에 입학시킬 수 있었다.
다음으로 권위주의. 독재 정권은 스스로 정당화를 위해 체육을 이용하면서 그 반대급부로 체육계에 일정한 이권을 제공했다. 그 이권은 공정한 자유경쟁이 아니라 선후배 관계와 같은 서열 구조를 경유해 분배됐다.
그 결과 체육계는 철저한 위계 관계가 지배하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미시적으로 지도자로부터 선배를 거쳐 후배로 이어지는 공고한 권력관계가 구축됐다. 거시적으로는 상부의 명령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관행이 만들어졌다. 이른바 '체육 대통령'으로 불렸던 한 인물의 지휘로 일사불란하게 이권을 상납하는 일이 이런 구조 아래서 가능해진 것이다. 최고 권력자를 장악한 최순실에게 체육계는 가장 쉽게 포획할 수 있는 먹잇감이었다.
그 결과는 참담하다. 원래 체육은 비록 허구적인 것이라 해도 공정성의 신화에 바탕을 두고 사람들을 매혹해 온 분야이다. 그런데 바로 그 공정성의 신화가 밑바닥부터 흔들리고 있다. 공정성을 의심받고도 과연 한국에서 체육이 존립할 수 있을까? 미리 짜여진 '쇼'임이 밝혀지면서 최고 인기 종목에서 한순간에 스포츠가 아닌 것으로 외면받으며 몰락한 프로레슬링의 처지가 이제 우리 체육계 전체의 운명이 될 위험성이 커지고 있다.
그렇다면 2017년 우리 체육계의 목표는 자명하다. 지난 반세기 가까이 우리 체육계를 지배해 온 국가주의와 권위주의의 틀을 벗어던져야 한다. 운동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행복을 위한 체육의 틀을 정립해야 한다. 다행히 어려움을 딛고 통합에 성공한 대한체육회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 갈 기본 틀은 마련해 놓았다. 이제 이 틀을 애초의 목적대로 잘 활용해 나가는 것은 온전히 체육계의 몫이다.
여러 가지 과제가 놓여 있지만 우선 1년 앞으로 다가온 평창동계올림픽의 목표 메달 수를 정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 보면 어떨까?
선수들이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만족을 느끼고 국민들이 그들의 모습을 보며 즐거워한다면 메달 순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누구나 알고 있을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해 본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올림픽에서 각 국의 메달 순위를 결코 집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