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기록을 보유해도 특별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 선수도 있다. 그저 '잘하는 선수'로만 기억됐다. 한 경기, 한 시즌, 길게는 한 선수의 프로 생활 중 팬들의 뇌리를 비집고 들어갈 만한 임팩트가 필요하다. 물론 기회는 매번 찾아오지 않는다.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는 더 어렵다.
이대호(35·롯데) KBO리그 최고 스타다. 지난 1월, 메이저리그 도전을 뒤로하고 친정팀 복귀를 선언하며 팬심(心) 흔들었고, 개막 후 몇 경기만으로 사직 구장을 넘어 KBO리그를 요동치게 하고 있다. 그는 14일까지 나선 12경기에서 타율 0.452·5홈런·10타점·13득점·출루율 0.558·장타율 0.833를 기록했다. 타율, 홈런, 득점, 출루율, OPS(출루율+장타율), 최다 루타(35) 모두 1위다. 지난해 8위 팀 롯데는 14일 현재 공동 2위(8승 4패)를 달리고 있다.
기록만 좋은 게 아니다. 홈런과 타점의 생산 타아밍은 이대호가 왜 스타인 지 증명한다. 실속 있고, 강렬하며, 극적이다. 5개의 홈런과 10개의 타점 모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이대호는 KBO리그 복귀전이던 3월 31일 마산 NC전에서 4타수 3안타를 기록했다. 이날 NC 외인 투수 제프 맨쉽은 180만 달러 몸값을 증명했다. 하지만 이대호는 4회초 2사 2루에서 중전 적시타를 치며 선취점을 이끌었다. 팀의 첫 안타이자 타점이었다. 15연패 기로에서도 그가 불씨를 살렸다. 롯데가 4-6으로 뒤진 9회초, 선두 타자로 나서 상대 마무리투수 임창민으로부터 좌월 솔로 홈런을 때려냈다. 한 점 차로 추격하며 상대를 압박했다. 팀은 5-6로 패했지만 이대호만은 빛났다. 기대와 예상에 어긋나지 않는 경기력이었다. 롯데는 2차전에서 3-0으로 승리하며 NC전 연패를 끊었고, 3차전에서도 승리하며 약 2년 만에 상대전 우세 시리즈를 거뒀다. '이대호 효과'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잘 다녀왔습니다'.
이대호의 시즌 2호 홈런이자 3번째 타점은 마치 그랬다. 길어던 도전 여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을 반기는 이들에게 더없이 좋은 선물을 안겼다.
4월 4일 롯데의 홈 개막전. 1회말 롯데가 넥센에 1-0으로 앞선 1사 2루에서 1루측을 가득 메운 관중들이 먼저 돌아온 4번 타자를 맞이했다. 특유의 메아리 '대~호'와 함께 말이다. 이대호는 헬멧을 벗어 화답했다. 함성이 커졌다. 그리고 불과 상대 투수 최원태의 세 번째 공에 구장의 데시벨은 배가됐다. 이대호가 좌월 홈런을 때려냈다.
복귀 첫 타석 홈런. 극본이라면 식상하다. 지나치게 완벽한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추세는 고전이다. 하지만 이대호는 스포츠라는 극본 없는 드라마에서 가장 완벽한 오프닝을 만들어냈다. 사직 구장 관중 수, 주변 상권 매출 모두 크게 늘었다는 후문이다.
이후 3경기에서 주로 득점 기회를 만드는 역할을 한 이대호는 4경기 만인 9일 사직 LG전에서 다시 홈런과 타점을 가동했다. 연승 가도로 상승세던 두 팀의 맞대결이었다. 1승씩 나눠가진 뒤 맞는 3차전이었다. 3회까지 팽팽하던 승부는 4회말 균형이 깨졌다. 롯데가 1사 만루에서 폭투와 사구로 2득점을 올렸다. 이대호는 바뀐 투수 최동환을 상대로 이날 롯데의 첫 적시타를 치며 3점째를 만들었다.
쐐기포도 그의 몫이었다. 롯데는 4회 공격에서 추가 2득점했지만 6회 1점을 내줬다. 이대호는 6회 선두 타자로 나서 4점 차를 5점으로 벌리는 솔로 홈런까지 때려냈다. 롯데는 이날 7-1 완승을 거뒀다.
'멱살 잡아다가....'.
시즌 4, 5호 홈런은 한 경기에 나왔다. 이 경기 뒤 롯데팬의 반응은 격할수 밖에 없었다. 이대호의 위력을 절감했고, 뒷받침이 부실했던 불펜진에 분개했다.
롯데는 13일 인천 SK전에서 시즌 첫 연패를 당했다. 전날 경기에서도 연장 12회 끝내기 안타를 허용하며 1-2로 패했고, 이날도 9회 끝내기 안타로 10-11로 패했다.
1회부터 난타전이었다. 롯데는 3회까지 3-8로 뒤지며 기선을 내줬다. 하지만 4회초 신본기의 2타점, 앤디 번즈가 스리런 홈런을 치며 단숨에 5득점 했다. 그리고 이대호가 8-8 동점에서 상대 투수 문광은의 커브를 받아쳐 역전 좌월 홈런을 때려냈다. 자신의 4호, KBO리그 시즌 두 번째 백투백 홈런이었다. 앞선 첫 번째도 이대호가 최준석과 합작했다.
패색이 짙던 순간에도 그가 나섰다. 롯데는 5회 재역전을 허용한 채 9회초 마지막 공격을 맞았다. 9-10에서 한 점이 나오지 않았다. 이우민과 번즈도 모두 범타로 물러났다. SK 마무리 투수 서진용은 전날 블론세이브를 만회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대호가 있었다. 서진용의 몸쪽 공을 당겨쳐 다시 좌측 아치를 그렸다. 공은 그대로 담장에 떨어졌다. 1, 3루 양측 벤치와 관중석의 희비가 엇갈렸다. 중계 해설자는 그를 향해 "사람이 아니다. 저런 선수가 다 있느냐"고 했다. 공감하는 이가 많았을 것이다. 패했지만 SK의 끝내기 승리만큼이나 이대호가 남긴 여운이 짙었다.
이대호는 14일 사직 삼성전에서 시즌 10번째 타점을 기록했다. 첫 2연패를 당한 롯데에게 중요한 경기였다. 1회초부터 삼성 선발 윤성환을 잘 공략해 4득점 했다. 하지만 선발 박진형이 흔들리며 4-5로 역전을 허용했다.
이 경기에서도 주인공은 이대호였다. 7회말, 1사 1루에서 문규현이 좌익수 키를 넘기는 적시타를 치며 동점을 만들었다. 그리고 손아섭이 볼넷을 얻어내며 만든 1·2루 기회에서 이대호가 바뀐 투수 김승현 상대로 좌전 안타를 때려냈다. 문규현이 여유 있게 홈을 밟았다. 이날 경기 결승타였다. 롯데는 이후 땅볼과 상대 폭투로 추가 3득점을 올려 점수 차를 벌린 뒤 결국 9-6으로 승리했다.
이대호가 언제까지 극적인 활약을 이어갈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롯데팬들은 4번 타자의 타석이 돌아올 때마다 기대감이 커진다. 그로 인해 이길 것 같아서, 패하지 않을 것 같아서, 이겨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