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조금 편한 길을 걷고 싶을 만도 한데, 한화 외야수 김원석(28)은 고개부터 저었다. 요즘 한창 유행했던 '꽃길'이라는 단어는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그는 노력한 만큼 결실을 얻는, 그런 인생을 꿈꾼다. 노력하는 것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어서다.
독립 야구단 출신의 무명 선수. 굽이굽이 너무 많은 길을 돌아왔다. 그런 그가 올 시즌 개막 직후 가장 환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개막전에 한화 1번 타자로 전격 선발 출장해 1회 첫 타석부터 안타를 쳤다. 그것도 지난해 22승 투수인 더스틴 니퍼트(두산)의 시즌 첫 공을 받아쳐 안타를 만들어 냈다. 그 다음 날엔 안타를 무려 네 개나 쳤다. 연장 11회 결승타도 날려 승리의 주역이 됐다. 새로운 인간 승리의 드라마에 야구계가 주목하고 환호했다.
그 순간, 다 끝난 듯했던 시련이 한 번 더 찾아왔다. 개막 닷새 만에 왼쪽 햄스트링 부상을 당해 전열을 이탈했다. 하늘이 무심하고 야속했다. 그는 "왜 하필 '지금'인가, 왜 또 나인가 싶었다"며 애써 웃었다. 그러나 여기서 기억해야 할 한 가지. 야구선수 김원석의 주무기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극복'이다. 툭툭 털고 다시 일어났다. 길고도 짧았던 한 달이 흘렀다.
어느새 김원석은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대전구장 더그아웃에 서 있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내가 지금 있는 이 곳이 얼마나 감사한 자리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새삼 그의 지난 인생과 지금의 마음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두서 없이 질문을 던졌다.
-이제 막 묵은 한을 풀어 버리려던 시기에 부상이 찾아왔다. "시즌 준비를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도 그렇게 빨리 부상이 올 줄은 몰랐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햄스트링 통증은 처음 느껴봤다. 어떻게 관리를 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그래도 최대한 열심히 회복하려고 애썼다. 지금도 웜업 때 누구보다 스트레칭을 열심히 하고 있다. 아프면 무조건 내 손해니까."
-다치는 순간 어떤 생각이 들었나. "가장 먼저 '왜 하필 지금'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왜 내가 또 이렇게 되나, 나는 또 여기까지인가.' 그런데 조금 지나니 다른 마음이 들었다. '지금'만 생각하면 아쉬운 게 맞다. 하지만 내가 다쳐서 재활을 한다고 해도 한화 유니폼을 입은 야구 선수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 유니폼조차 입지 못했던 때를 생각하면 그것조차 배부른 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1군에서 경기에 나서고 많은 사람들의 응원을 받는 것은 내게 당연한 일이 아니라 감사해야 할 일인 거다. 그래서 열심히 재활을 했다. 다시는 아프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한 달 만에 돌아왔다. "다시 1군에 와 있지만, 여기가 내 자리라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이 자리에 오고 싶어하는 선수들이 너무나 많은데, 내가 엔트리에 이름을 올린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앞으로 라인업에 계속 들어가려면, '열심히'는 물론이고 '잘' 해야 한다."
-왜 야구 선수가 됐나. "원래 운동을 좋아했다. 처음엔 축구를 하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몸싸움 없는 야구를 하는 게 낫겠다고 하셨다. 중학교 때까지는 공부와 병행하면서 취미처럼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 그때 야구로 진로를 정했다."
-왜 야구였나. "그냥 야구하면서 뛰어 다니는 게 좋았다. 사실 야구를 잘하지는 못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키가 153㎝밖에 안 됐다. 우리 학교도 잘하는 팀이 아니었다. 사직중 3학년 때 1년 동안 1승 전패를 했다. 부산공고에 갔더니 1학년 때 또 1승 1무 전패를 했다. 이기는 기쁨을 거의 못 느껴봤다. (웃음) 그래도 우리끼리 똘똘 뭉쳐 열심히 했더니 3학년 때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 4강에 들었다. 선수가 16명뿐이라 내가 투수·3루수·중견수를 다 할 정도였는데, 선수 60명이 넘었던 천안 북일고도 이겼다. 지금도 어쩌다 모교에 가보면 후배들이 부산고나 경남고에 지는 걸 당연하다고 여길 때가 있더라. 그럴 때면 우리가 청룡기 4강에 갔던 얘기를 하면서 '너희도 할 수 있다'고 말해준다."
김원석은 아직도 그때 생각을 하면 신이 난다. 고교와 대학(동의대) 선배인 LG 윤지웅에게 여전히 가끔 청룡기 얘기를 하며 어깨를 으쓱할 정도다. 마냥 즐겁기만 했던 열여덟 까까머리 고교생은 지금 벌써 20대 후반이 돼 있다. 그 사이 그 청년에게는 많은 일이 벌어졌다. 동의대에 진학한 뒤 매일 새벽까지 훈련하며 구슬땀을 흘렸다. 그러나 2012년 한화에 투수로 입단하자마자 타자 전향을 권유받았다. 결국 5개월 만에 배트를 쥐고 새 출발을 했지만, 제대로 꽃을 피워보지 못하고 2년 만에 방출됐다.
군 복무는 그때 그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곧바로 현역으로 입대했다. 삼성과 두산의 한국시리즈가 열리던 2013년 10월, 이등병 김원석은 TV 화면으로 동기생들이 활약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쓸쓸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그의 손에는 낡아빠진 걸레가 쥐어져 있었다. 이제 막 첫 실패를 맛본 젊은 야구 선수의 마음 속에는 그 순간이 아프게 새겨졌다.
-그때 TV 속에서 누가 뛰고 있었나. "두산 윤명준, 삼성 우동균과 동기생이다. 개인적인 친분은 없지만, 학창시절부터 잘 하던 선수들로 유명해서 알고 있었다. TV로 한국시리즈를 보고 있는데, 윤명준이 계속 등판해서 너무 잘 던지는 거다. 속으로 '고등학교 때부터 잘 하더니, 지금도 역시 잘 하네'라고 생각하고 있는 찰나였다. 누가 옆에서 툭 치더니 '걸레 빨러 안 가느냐'고 했다. 시간을 보니 청소할 시간이 다 됐더라."
-벌떡 일어나야 했겠다. "군대 걸레는 (대전구장 더그아웃의 잿빛 바닥을 가리키며) 딱 이런 색이다. 처음엔 파란색이나 초록색이지만, 나중에는 너무 더러워져서 빨아도 빨아도 그냥 계속 회색이다. (웃음) 그런 걸레를 빨아서 물기를 퍽퍽 털다가 문득 화장실 거울 속 내 얼굴을 봤다. 안 그래도 스물 다섯에 군대를 갔으니 남들보다 늦은 편이었다. 그 순간 '저 친구는 지금 프로에서 저렇게 잘 던지고 있는데, 나는 지금 몸에 걸레 빤 물이나 튀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새롭게 의지를 다졌나. "야구를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전역하고 곧바로 연천미라클을 찾아갔다."
-독립구단의 현실은 프로와 많이 다르다. 선수들에게 회비를 받아야 운영할 수 있다고 들었다. "그렇다. 많이 어렵다. 선수들이 회비 70만원씩을 내도 운영비가 부족한 건 사실이다. 그 회비를 감당하기 위해 주말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선수들도 있다. 다행히 나는 감사하게도 아버지가 도와주셨다. '네 뒷바라지 하는 게 내 행복이다. 넌 야구나 열심히 하라'면서 매달 회비를 내주셨다. 그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더 열심히 하게 됐다."
-그렇게 다시 한화로 왔다. "이렇게 일찍 돌아올 것이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다. 사실 나는 인생에서 '서른'의 의미를 아주 크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나이 서른에도 별다른 가망 없이 2군에만 머물러 있어야 한다면, 나 스스로 야구를 그만 둬야겠다는 생각을 계속 했다. 딱 서른까지 후회나 미련 없이 노력할 만큼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하루 빨리 다른 인생을 선택할 준비를 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럼 이제 다른 인생은 당분간 찾지 않아도 되겠다. "살짝 보류가 됐다. (웃음) 그렇다고 앞으로도 달라질 건 없다. 내가 1군에 계속 있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지 않나. 계속 1군에서 살아 남기 위해 매 순간 열심히 해야 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딴 생각이 끼어들 틈 없이 야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다른 계획은 보류하는 것이다. 급하게 생각하거나 당황스러워하지 않고, 차근차근 야구를 더 잘할 수 있게 준비하겠다."
김원석의 부모는 고향 부산에 산다. 아버지는 김명균(62)씨, 어머니는 남경순(58) 씨다. 그는 부모님의 이름 한 글자, 한 글자를 정성스레 발음했다. 신문에 부모의 이름이 처음으로 실리게 됐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아들이 프로야구 선수라는 사실을 실감하기 어려웠던 부모다. 이제는 TV로 아들이 뛰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가장 큰 기쁨이다.
아들 역시 부모의 자랑거리가 됐다는 게 행복하다. 몸 관리를 위해 금주를 하고 있지만, 아버지와 식사할 때는 유일하게 술을 입에 댄다. 그는 "아버지를 만났을 때만 맥주를 조금 마신다. 최근에는 대전으로 모셔서 한우를 대접했다"며 씩 웃었다.
-꿈에 그리던 1군이다. 뛰어 보니 가장 좋은 점은 뭔가. "아무래도 부모님이 좋아하시는 것이다. 두 분은 항상 내게 '거만해지지 말고 더 겸손해야 한다. 늘 차분하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정작 어머님이 더 들뜨신 것 같다. (웃음) 사실 처음 프로에 지명돼 축하 인사를 받았을 때를 제외하면, 내가 야구 선수라는 것을 부모님도 실감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동안 내가 아무 것도 한 게 없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TV 중계에도 나오고 주위에서 인사도 받으시니까 어머니가 많이 좋아하신다."
-햄스트링 부상이 그래서 더 안타까웠을 듯하다. "아무래도 그렇다. 부모님은 그냥 전화로 '괜찮냐'고만 물으시고 별 말씀 안 하셨다. 그래도 통화를 하면 내 기분을 살피시는 게 느껴지니 또 마음이 안 좋다. 괜히 내가 다치는 바람에 또 걱정만 시키는 아들이 돼버렸다. 그럴 때면 '한 달 안에 꼭 다 나아서 어버이날에는 1군에 올라가자. 그때 잘 해서 선물을 드리자'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
-결국 어버이날 전에 올라왔다. "다행히 4일자로 1군 엔트리에 복귀했고, 어린이날 경기에서는 안타도 쳤다. 정작 어버이날에는 경기가 없었지만, 다시 내가 뛰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어서 만족했다."
-그동안 어려운 길을 걸어 왔다. 앞으로 남은 선수 생활은 어떻게 이어가고 싶나. "이제 겨우 한 발 나갔을 뿐이다. 아무래도 '탄탄대로'는 못 걸을 것 같다. 인생도 그렇고, 야구도 그렇다. 대충대충 했는데도 운이 좋아 잘 풀리고 어려움 없이 나아가는, 그런 건 내 인생이 아닌 것 같다. 내가 100을 준비했을 때, 60~70 정도는 받을 수 있는 인생이라면 좋겠다. 그렇다면 80~90을 받기 위해 120~130을 준비하면 되는 거니까. 그만큼 내가 더 많이 노력해서라도 뭔가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다."
-노력의 보답을 받는 성취감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인가. "운동이 그런 것 같다. 내가 하는 만큼 돌아온다. 나도 딱 그만큼만 받고 싶다. 내가 준비하는 만큼, 열심히 하는 만큼, 생각하는 만큼. 그라운드에 나와서 내가 생각한 플레이가 나오고, 안타를 치고, 홈런을 치는 것으로 돌려 받았으면 좋겠다. 그 과정에서 느끼는 보람이 가장 크다. 그 성취감을 계속 느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