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한국시간) 워싱턴 내셔널스는 외야수 브라이스 하퍼(25)와 2018년 연봉 계약에 일찌감치 합의했다. 기본 연봉 2162만5000달러에 MVP 보너스 등을 더한 총액은 무려 2262만 달러(약 254억원). KBO 리그 최고 연봉(이대호 25억)의 열 배에 가까운 거액이다. 하퍼는 이날 필라델피아와의 홈 경기에서 계약 성사를 자축하듯 끝내기 2점 홈런도 쏘아올렸다.
하지만 '시작'에 불과하다. 지난 겨울부터 워싱턴은 하퍼의 에이전트 스캇 보라스와 다년 계약 연장 협상을 했다. 당시엔 결렬됐다. 보라스의 요구는 10년에 총액이 무려 4억 달러였다. 14일 합의한 2018년 몸값은 4억 달러의 5.6%에 불과하다. 본격적인 '협상'은 내년으로 미뤄진 셈이다.
이미 양 측은 올해 1월 연봉1326만5000달러에 2017년 계약을 했다. 그로부터 6개월도 지나지 않아 2018년 연봉 협상을 조기에 마감했다. 2262만 달러도 연봉조정신청 자격을 갖춘 선수의 단년 계약으로는 역대 최대 규모다. 종전 기록은 데이비드 프라이스(보스턴)가 2015년 디트로이트와 계약한 1975만 달러였다. 시즌이 한창인 5월에 일찌감치 내년 연봉 계약을, 그것도 신기록을 세우면서 맺었다. 워싱턴 구단이 슈퍼스타 하퍼를 최대한 '예우'했다는 분위기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번 계약은 하퍼가 워싱턴에 남을 가능성이 좀 더 줄였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1년짜리 계약보다는 다년 계약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하퍼는 2018시즌을 끝으로 FA(프리에이전트) 자격을 얻는다. 협상할 시간은 차고 넘치는데, 이미 '마지막 해'를 정한 것처럼 보인다. 하퍼 이전 기록 보유자인 프라이스도 그랬다. FA 자격 취득 1년 전 디트로이트와 단년 계약을 했을 때 많은 이들이 그의 이적을 예상했다. 결국 프라이스는 2015시즌 뒤 보스턴과 7년 2억1700만 달러에 계약했다.
이번 계약으로 하퍼는 2018년 시즌 뒤 FA 시장의 최대어 자리를 굳힌 셈이다. 메이저리그 데뷔 전부터 받은 스포트라이트도 이어가게 됐다. 하퍼는 고교생이었던 2009년부터 유명 스포츠 잡지의 표지 모델이 되며 전국적인 조명을 받았다. 2012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해 2년 연속 올스타에 뽑혔고, 4년 차던 2015년엔 42홈런을 치며 역대 최연소 만장일치 MVP 수상에 성공했다.
‘꽃길’을 걷는 동안 경기 외적으로는 호불호가 갈렸다. 자기과시적이고 도발적인 언행으로 타 팀 팬들에게는 단골 야유 대상이 됐다. MVP가 되기 전까지는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직접 그를 '가장 과대평가된 선수'로 꼽기도 했다. 하지만 하퍼는 언행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그는 불문율로 가득한 메이저리그 분위기를 ‘따분하다’고 표현했다. 자축성 세레머니를 건방진 몸짓으로 해석하는 메이저리그 문화에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승리를 향한 갈망과 열정을 담을 아바타로 그만한 인물도 없다.
성적만 봐도 하퍼는 메이저리그 최고 스타가 되기에 충분하다. 지난해 타율 0.243으로 부진했지만, 올시즌 다시 강력한 MVP 후보로 떠올랐다. 15일 현재 성적은 타율 0.384에 12홈런, 34타점을 기록했다. OPS(출루율+장타율) 1.252는 메이저리그 전체 1위다.
하퍼라는 '상품'의 진정한 가치는 나이다. 1992년 10월 16일생인 하퍼는 미국식으로 아직 만 24세다. 지난해 아메리칸리그 MVP 마이크 트라웃(26), 내셔널리그 MVP 크리스 브라이언트(25)보다 어리다. 물론 최근 메이저리그는 젊은 스타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하퍼처럼 만 24세 이하 선수 중에도 미겔 사노, 무키 베츠, 프란시스코 린도어, 잰더 보가츠, 카를로스 코레아, 코리 시거, 매니 마차도 등 스타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이들 중 하퍼만큼 이른 나이에 FA 자격을 얻는 선수는 볼티모어의 마차도 정도 뿐이다. 마차도는 아직 하퍼처럼 파괴적인 시즌을 보낸 적이 없다. 나이와 기대 성적을 종합했을 때, 하퍼와 비견될 가치를 갖고 FA 시장에 뛰어들었던 선수는 10여년 전 알렉스 로드리게스(은퇴)가 마지막이다. 로드리게스는 2007시즌 뒤 뉴욕 양키스와 10년 2억7500만 달러에 계약했다. 당시 역대 FA 최대 규모 계약이었다. 현재는 지안카를로 스탠튼(마이애미)의 13년 3억2500만 달러가 최고다.
2018년 시즌 뒤 양키스 같은 빅 마켓 구단이 하퍼를 노릴 것이라는 예상은 일반적이다. 그렇다고 현 소속팀인 워싱턴이 가난한 구단인 것도 아니다. 워싱턴 구단주 테드 러너는 순자산이 50억 달러가 넘는 부동산 재벌이다. 2015년 맥스 슈어저(7년 2억1000만 달러), 2016년 스티븐 스트라스버그(7년 1억7500만 달러) 등 굵직굵직한 계약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두 선수의 에이전트는 하퍼와 같은 보라스다.
올해 5월에 2018년 계약을 발표했듯, 깜짝 연장 계약 발표가 나올 가능성도 있다. 워싱턴은 올해 내셔널리그에서 네 번째로 많은 연봉을 지출하는 구단이다. 최근 5년 동안 세 차례 지구 1위를 했지만, 모두 디비전시리즈에서 탈락했다. 우승에 대한 갈망이 큰 구단이다. 하퍼를 빨리 포기하는 맥빠지는 선택을 쉽게 하진 않을 것이다.
메이저리그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총아의 미래는 어디에 있을까. '10년 4억 달러'라는 하퍼와 보라스의 배짱이 현실로 이뤄질 가능성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박기태(야구공작소) 야구 콘텐트, 리서치, 담론을 나누러 모인 사람들. 야구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공유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