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째 두산 유니폼을 입고 최고 외국인 투수 자리를 지키는 더스틴 니퍼트일까. 그렇지 않다. 물론 니퍼트도 1000이닝을 훌쩍 넘기면서 엄청난 내구성을 자랑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오랜 시간 마운드를 지킨 투수가 딱 한 명 더 있다. 삼성 윤성환(36)이다.
윤성환은 2011년부터 2017년 6월 13일까지 총 1038이닝을 소화했다. 이 기간 동안 규정이닝을 채운 선발 투수는 KBO 리그를 통틀어 다섯 명밖에 없고, 그 가운데 1000이닝을 넘게 던진 투수는 윤성환과 니퍼트뿐이다. 승리(78승)와 평균자책점(3.78)도 윤성환이 국내 투수들 가운데 1위다. 167경기에서 1038이닝을 던지는 동안 볼넷을 220개만 내줬다. 니퍼트(329개)와 비교해도 엄청나게 적은 수치. 그만큼 꾸준했고, 강했다.
그동안 쌓아올린 기록에 비해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지는 못했다. 그래서 윤성환의 묵묵한 노력은 더 많은 박수를 받을 필요가 있다. 이 인터뷰는 오로지 '선발 투수' 윤성환의 가치와 노하우에 초점을 맞췄다. 최근 7년 사이 1군 마운드에서 공 1만6480개를 던지면서 축적된 베테랑 투수의 비법이 담겨 있다.
-올 시즌 팀 성적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팀 성적이 많이 떨어지니 초반에는 아무래도 위축되고 당황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지난해에도 성적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로 다른 팀들이 쉽게 보지는 않았으니까. 어느 순간부터 선수들도 그런 부분을 느끼고 화가 나기도 했다. 어떻게 위기를 극복해야 하나 고민도 했다. 그래도 이게 현실이니까 어쨌든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계속 조금씩 이겨가다 보면 더 좋아지지 않을까."
-삼성 선발 투수 5명이 모두 10승을 하던 시즌이 불과 2년 전이다. 지금 삼성 선발진은 윤성환에 대한 의존도가 더 커졌다. 어깨가 무겁나.
"나나 우규민이나 외국인 투수가 나갈 때 팀이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진 것 같다. 우리가 승리 투수가 돼야 한다는 게 아니라 팀이 승리해야 한다는 의미다. 예전에야 선발 투수 다섯 명이 다 좋았으니 내가 오늘 못 해도 다음 날 팀이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올해는 '나가면 이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오히려 그 부분이 게임에 영향을 미칠 때도 있더라."
-부담감 때문인가.
"아무래도 그렇다. 자신감은 항상 있지만, 시즌 초반에 나 스스로에게 놀란 적이 있다. 선취점을 딱 주는 순간, '오늘도 지는구나' 하는 마음이 나도 모르게 생기는 거다. 원래는 절대 그러지 않았다. 경기 상황이 어떻든 내가 할 부분은 제대로 했어야 했는데, 어느 순간 나조차 쉽게 포기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걸 깨닫고 스스로 '아차' 싶어서 마음을 고쳐 먹는 계기가 됐다. 솔직히 예전에는 팀도 승리하고 나도 승리 투수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그냥 팀이 이기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올해 부임한 김한수 감독님이 늘 선수들을 편하게 해주려고 하시는데, 고참 선수로서 면목이 없어서 한동안은 감독님 얼굴도 쳐다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팀에 대한 책임감이 훨씬 커진 것 같다.
"아무래도 이제 고참이 됐고, 팀에 중간급 투수들이 많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사실 나는 원래 '내 할 일만 확실히 하자'는 주의였다. 프로 선수니까 각자 알아서 잘 하는 게 맞고, 코치님도 계시니 나는 내 운동에 집중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은 코치님의 역할이 있다면 고참이 해야 할 역할도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는 처음 선발 투수를 해보는 후배들이 질문을 던질 때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해주려고 한다."
-가장 해주고 싶은 조언은 무엇인가.
"선발 투수는 힘든 보직이다. 완급조절이 특히 어렵다. 중간 투수가 선발로 전환했을 때, 원래 하던 대로 힘으로만 던지면 5회를 넘기기가 어렵다. 그건 사실 본인이 스스로 깨닫는 게 가장 좋다. 나도 던져 보면서 깨달았으니까. 그래도 경험자로서 그런 부분을 얘기해줄 수는 있다. 긴 이닝을 안 던져본 선수들은 처음에는 사실 그 벽을 깨기가 어렵다. 처음으로 6이닝 던지고 다음 날 힘들어서 '공 못 던지겠다'고 하는 투수들도 많다. 그래서 더 관리를 잘 하고 힘 조절을 해야 한다. 완급조절은 정말 가장 중요하다."
2004년 삼성에 입단한 윤성환은 2008년 처음으로 선발 투수라는 보직을 맡았다. 스스로 "첫 해에 10승을 하긴 했지만 시행착오가 많았다"고 했다. 처음에는 5이닝을 넘기는 것도 벅차게 느껴졌고, 10경기 넘게 던진 후에야 조금씩 완급조절의 중요성을 깨달아갔다.
그런 그가 다른 차원의 투수로 한 단계 올라선 것은 선발 전환 4년째인 2011년이었다. 오치아이 에이지 투수코치를 만나면서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그는 "한창 스피드가 떨어져서 고민이었을 때, 코치님이 '너는 공 빠른 투수들보다 볼이 훨씬 좋고 회전력도 좋아서 전혀 문제될 게 없으니 신경 쓰지 말고 네 공을 던지라'고 해주셨다"며 "그때부터 기술적으로나 멘탈적으로나 많이 성숙해진 것 같다"고 했다.
그 후 윤성환은 단 한 경기도 허투루 던진 적이 없다. 매 경기를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준비했다. 수행자의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자신과 싸웠다. 이제 30대 후반으로 접어드는 투수가 여전히 서른 살 투수 못지 않은 체력과 자신감을 갖고 있는 비결이다.
-2011년 이후 가장 많은 이닝을 던진 투수다. 어떤 노하우가 있나.
"진짜 노하우는 '운동'이다. 정말 열심히 운동했다. 나는 사실 선발 등판하는 날이 가장 편하다. 오히려 등판 사이에 준비하는 4~5일이 더 힘들다. 등판 다음날 러닝을 하고, 그 다음에 웨이트트레이닝을 하고, 또 러닝, 또 웨이트트레이닝, 또 러닝, 그리고 보강 운동까지 반복되는 스케줄 자체가 너무 힘들다. 당연히 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힘든 건 어쩔 수 없다. 그 과정을 한 시즌 동안 반복하고, 또 그걸 매년 반복한다는 게 쉬운 게 아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을 운동에 쏟았는지 셀 수도 없다. 그 과정은 에너지를 얻기 위한 나와의 싸움이다. 등판일을 위해 등판하지 않는 날 에너지를 채워야 하는데, 그걸 하기 싫어서 소홀히 하다 보면 부상이 오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꾸준히 그 과정을 잘 준비하면 경기 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그런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운동의 효과는 성적으로 충분히 증명했다.
"정말 하루하루를 누가 더 '재미없게' 보내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 같다. 지난 번에 양현종(KIA) 인터뷰 기사를 보니 여름을 대비한 몸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했더라. 나 역시 공감을 했다. 더워질수록 몸이 처지고 힘드니까 운동도 하기 싫어진다. 그런데 그런 시기를 잘 이겨냈을 때 항상 결과가 좋았다. 그리고 그 결과를 알기 때문에 견딜 수가 있다. '역시 현종이도 오랫동안 잘 하는 이유가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양현종은 윤성환과 함께 2011시즌부터 현재까지 규정이닝을 소화한 유일한 국내 투수다. 윤성환과 양현종을 제외한 나머지 세 투수는 모두 외국인이다.) 선발 등판을 준비하면서 늘 힘들었는데, 그 힘들었던 시간이 내가 꾸준히 던질 수 있는 밑바탕이 됐다."
-본인만의 특별한 루틴이 있나.
"한 가지 운동만 하지 않고 여러 가지를 병행한다. 예를 들어 하체 운동을 해도 이번 주에 스쿼트를 했다면 다음 주에는 다른 걸 해보는 식이다. 1년 간 같은 운동은 도저히 지루해서 못 하기 때문에 계속 종목을 바꿔 준다. 최근에도 트레이닝 코치님과 새로운 운동을 시도했는데, 정말 숨이 턱까지 찼다. (웃음)"
-투수에게는 '롱런'도 재능일까.
"사실 프로 1군에서 뛰는 투수들은 실력차가 그리 크지 않다. 1년간 부상 당하지 않고 1군에서 풀타임을 뛸 수 있다면 성적은 어느 정도 분명히 나온다. 그러나 구위가 떨어지거나 부상 같은 문제가 생기면 계속 버티면서 던질 수가 없다. 꼭 내 얘기가 아니라도, 롱런하는 투수들을 보면 분명히 자기 자신을 관리하는 자신만의 루틴과 의지가 있다. 나와의 싸움에서 이기면 상대방하고 싸우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길 수 있다."
윤성환은 2015시즌을 앞두고 삼성과 4년 80억원에 FA(프리에이전트) 계약을 했다. 올해가 계약 세 번째 시즌. 지난 2년간 몸값 그 이상의 역할을 했고, 대표적인 '모범 FA' 가운데 한 명으로 꼽혔다. 올해도, 내년도 마찬가지다. 그는 계속 자신을 향한 신뢰를 굳건히 지켜 나갈 생각이다. 백 마디 말보다 마운드에서의 활약이 결국 후배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남긴다는 것을 잘 알아서다.
화려한 상패나 떠들썩한 인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힘이 닿는 데까지 '좋은 선발 투수'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싶어 한다. 14년간 프로 선수로 살아오면서 꾸준히 찾아낸 해답이 자신감의 원천이다. 그는 "내가 어떻게 하면 야구를 잘 할 수 있을지 답은 이미 나와 있다. 그 답을 내가 계속 따라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모든 게 좌우된다"고 했다. 윤성환은 마운드에서 공을 잘 컨트롤하는 투수지만, 스스로를 컨트롤하는 데 더 능하다. 그게 진짜 성공 비결이다.
-지금은 윤성환의 야구 인생에서 어떤 지점인가.
"야구 인생을 초반, 중반, 후반으로 나눈다면 이제 중반은 넘어선 것 같다.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시기다. 그런데도 여전히 매번 느끼는 건 '야구가 정말 어렵다'는 것이다. 잘 하기는 더 어렵다. 그리고 무엇보다 운동이 정말 힘들다. 진짜로. (웃음)"
-삼성의 젊은 투수들에게 롤모델일 텐데.
"젊은 투수들이 볼 때는 지금의 내가 커 보일 수 있겠지만, 사실 그들 모두 충분히 더 위로 올라갈 수 있다. 결국은 그 친구들이 팀을 이끌어 갈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는 있을 수밖에 없다. 아직 어리지 않나. 입단하자마자 한 번에 잘 할 수 있는 투수가 과연 몇 명이나 되겠나. 올 시즌 초반에 팀이 많이 힘들었지만, 좋은 경험이라 생각하고 더 자신 있게 경기에 임했으면 좋겠다. 야구는 올해만 하는 게 아니다. 내년에는 분명히 더 좋아질 것이고, 내후년에는 그보다 더 좋아질 것이다. 계속 열심히 하다 보면 분명히 (기량이) 좋아진다."
-앞으로 몇 년의 선수생활이 더 남았을까.
"지금 같아서는 마흔 넘어서까지 할 자신은 있다. 이렇게 계속 몸 관리를 한다면 가능할 것 같다. 하지만 그건 내가 얘기할 부분이 아니다. 동료들이, 코칭스태프가, 그리고 팀이 '윤성환은 몇 년 더 잘 할 수 있다'고 판단해줘야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 믿음을 심어주는 게 선수로서 중요하다. 말로만 '몇 년 더 하겠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운동과 기록으로 보여주고 싶다. 결국은 또 모든 게 자기 관리에 달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