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역사였다. 최초의 사건이자 축제였다. KBO 리그 10개 구단이 단 한 명의 선수를 향해 마음을 모았다. '국민타자' 이승엽(41)이 그 주인공이다.
이승엽은 9월 30일 잠실 LG전에서 후반기 내내 이어 온 '은퇴 투어'에 마침표를 찍었다. 올 시즌을 앞두고 미리 은퇴를 선언했고, 자신이 누볐던 전국의 모든 야구장에서 선물과 박수를 받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승엽이기에 가능했던 대장정. 그는 "모든 구단과 팬들께 감사드린다. 모두에게 평생 기념할 만한 선물을 받았다"고 했다.
은퇴 투어 마지막 주자는 LG였다. 경기를 앞두고 신문범 LG스포츠 대표이사가 직접 홈 플레이트 근처로 나왔다. 이승엽에게 스피커가 내장된 목각 기념패를 선물했다. 잠실구장과 이승엽의 타격 장면을 형상화해 만든 선물이다. 이승엽의 배트를 만드는 캐나다산 하드 메이플을 사용해 수제작 했다. 내부에는 스피커가 들어 있다. 버튼을 누르면 이승엽의 응원가가 울려 퍼진다.
이승엽은 1995년 4월 15일 잠실 LG전에서 1-1로 맞선 9회 류중일(전 삼성 감독)의 대타로 나와 LG 레전드 투수 김용수를 상대로 프로 데뷔 첫 안타를 때려 냈다. 바로 그 장소에서 바로 그 상대팀의 마지막 선물을 받았다. 기념패와 함께 준비된 '36번' 기념 액자에는 LG 선수들 전원이 이승엽에게 보내는 축하와 응원 메시지를 적었다. 박용택과 차우찬이 대표로 전달했다.
이승엽은 8월 중순부터 시작된 은퇴 투어를 앞두고 부담감을 감추지 못했다. "타 구단 관계자분들과 팬들에게 부담과 실례가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기우였다. 모든 구단과 야구팬이 한마음으로 이승엽의 마지막 순간을 기념했다.
첫 주자인 한화는 선수들의 메시지를 담은 베이스와 현판, 보문산 소나무 분재를 선물했다. 역대 최다승 투수인 송진우를 분재 전달자로 초청하는 깜짝 이벤트도 펼쳤다. 막내 구단 kt의 은퇴 투어 날은 때마침 이승엽의 선수 등록일상 생일(8월 18일)과 겹쳤다. 작은 생일잔치가 열렸다. kt는 현판과 액자, 인두화를 준비했다. 넥센은 이승엽의 등번호 36을 새긴 스페셜 유니폼을 제작했다. 넥센 선수들 전원이 경기 전 이 유니폼을 착용하고 그라운드에 도열하는 명장면도 연출했다. 유니폼 뒷면에 이승엽과 넥센 선수들의 사인을 담아 경매에 부쳤다. 수익금을 불우 이웃에게 기부했다.
SK는 여행 가방 2개에 각각 숫자 3과 6을 적어 선물했다. 가방 안을 각종 여행 용품으로 가득 채웠다. 치열한 승부의 세계에서 벗어나 여행을 다니며 휴식하라는 의미였다. 두산은 경기도 이천에서 직접 제작한 달항아리 도자기를 준비했다. 이 도자기에는 이승엽이 늘 좌우명으로 꼽은 '진정한 노력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롯데는 순금 10돈을 들여 제작한 잠자리채를 이승엽에게 건넸다. 이승엽이 아시아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에 도전하던 2003년, 야구장 외야에 처음으로 등장했던 잠자리채의 추억에서 아이디어를 따왔다. 롯데는 그해 이승엽에게 신기록을 완성하는 56호 홈런을 허용한 팀이다. KIA는 이승엽이 프로 데뷔 첫 홈런을 때려 냈던 광주 무등야구장 의자를 떼어 왔다. NC는 창원을 상징하는 '누비자 자전거' 모형을 선물했다.
1일 잠실 LG전을 마지막으로 이승엽의 '원정경기'는 모두 끝났다. 이승엽은 이제 3일 대구 넥센전에서 프로 23년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경기에 나선다. 진정한 '은퇴식'이다. 그는 현역 생활의 마지막 '목표' 하나를 남겼다. "마지막 경기에선 진짜 '이승엽다운' 스윙을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