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조성하(51)가 가는 곳엔 "될지어다"를 외치는 신도들이 모인다. 악수 한 번, 눈인사 한 번에 쓰러지는 신도들이 수두룩이다.
떠올려보면 항상 다른 모습이었다. 로맨티스트('황진이')였다가, 조선시대 왕('성균관 스캔들')이었다가, 꽃중년('왕가네 식구들')이었다가, 위선적인 대통령('THE K2')이기도 했다. 최근작 '구해줘'에서 사이비 교주인 영부님이 된 그는 백발에 흰 수트와 흰 구두를 차려입고 누구보다 자애로운 얼굴로 악행을 일삼았다. 같은 조성하, 너무나 다른 얼굴들이다.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그는 영화 '타클라마칸'을 통해 꼬일대로 꼬여버린 인생을 사는 남자 태식이 됐다. 태식은 사회 밑바닥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살인자가 돼 버린 기구한 인물. 영화 속 조성하는 영부님과는 전혀 다르다.
취중토크 인터뷰 장소에 등장한 조성하는 역할 속 모습을 조금씩 갖고 있었다. 악수를 청하는 아주머니에겐 온화한 미소와 함께 영부님의 얼굴로, 식사를 거른 스태프들에겐 온화한 왕의 얼굴로 변했다. 송아지 같은 맑은 눈망울로 두 딸의 이야기를 할 때면 세상 가장 상냥한 아빠였다.
두 시간 넘게 이어진 인터뷰 내용은 단 1초도, 한 마디도 버릴 수 없을 정도로 '좋은 말 대잔치'였다. 가난했던 어린시절, 조성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바로 잡아준 고등학생 시절에 대한민국 중년배우로 살아가는 현재까지 할 말도, 하고 싶은 말도, 그리고 듣고 싶은 말도 많았다.
조성하의 인생은 겸손과 진정성, 감동으로 똘똘 뭉쳐있다.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 만으로도 힐링되는 느낌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스스로를 "루저"라고 표현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다음 목표는 '구해줘'와 같은 신선한 영화를 만나는 것. 소주를 끊었다며 맥주를 '홀짝홀짝' 마신 조성하는 "오늘은 영이 맑은 분들을 만나 더 기분이 좋다"며 세 병을 깔끔하게 비웠다.
※인터뷰①에서 이어집니다.
- 헤어가 굉장히 튼튼한 것 같아요. "머리카락은 제 성격과 다르게 강직합니다.(웃음) 근데 탈색을 하도 많이 해서 지금 이 끝 부분은 머리를 감을 때마다 녹아서 끊어져요."
- 남배우들 최대 고민이 탈모라고 하죠. "뚜껑 쓰고 다니는 분들이 많이 있더라고요. 그러나 우리 집안은 가진 것이라고는 이것 뿐이에요. 긴 단어도 필요치 않아요. 한 마디로 '털'.(웃음) '털 복 터졌다'고 하죠."
- '구해줘'는 여러 의미로 역대급 드라마가 됐어요. 드라마에 사이비가 등장한 것도 처음이죠. "모든 것이 처음이었죠. 사이비 교주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도, 흰머리 흰양복 흰구두로 완전무장한 캐릭터도. 제 나이 또래에서 이제 수트하면 누가 떠오를까요? 하하."
- 조성하죠.(웃음) 흰수트 끝판왕이 됐어요. "그 느끼함을 희석시킬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백정기 반지 등 액세서리도 직접 주문제작을 부탁했어요. 대본을 처음 봤을 때 백정기는 일반적인 영감님과 큰 차이가 없었죠. 사이비 종교 이야기를 하는데 그 종교가 비실비실하면 이야기가 될까 싶었고 고민하다 그 강력한 힘을 비주얼적으로 먼저 완성하는 것이 좋겠다 판단했어요. 청중과 시청자를 모두 압도하고 싶었죠."
- 백정기는 완벽하게 배우 조성하가 만들어낸 캐릭터죠. "'무조건 흰머리에 흰양복을 입어야겠다'고 결정했고, 감독님과 작가님을 만났을 때 '난 머리를 백발로 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해주시면 감사하죠'라고 하더라고요. 시작할 때 다섯 번 탈색했고, 일주일에 한 번 씩 꼬박꼬박 탈색했어요. 총 16번 탈색했죠. 흰칠을 한 적도 있지만 보기 싫더라고요. 그러니 끝날 때는 녹아 떨어지는 거예요."
- 두피는 상하지 않았나요. "염증에 화상에 난리도 아니에요. 촬영 초반 집사람에게 '암보험 기본적인 것 들지 않았냐. 피부암도 있냐'고 물었더니 피부암은 안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빨리 들어~'라고 독촉했어요.(웃음)"
- 사실 방영 초반 '구해줘'에 대한 주목도는 높지 않았어요. 이후에는 '살살 연기해 달라'는 반응까지 나왔죠. "그럼요. 1%로 시작했으니까. 엄청나게 감사하고 어마어마하게 고마워요. 댓글은 감동이었죠. '연기가 오버다'라는 반응과 '연기 살살해 주세요'라는 반응은 너무 다르잖아요? 심지어 전 연기를 최대한 살살 했거든요. 부담스러워 할까봐 살살했는데 그걸 더 살살해 달라고 하니 '숨만 쉬라는 것인가' 싶었죠.(웃음)"
- 느끼할 법한 신도 '무섭다'는 반응이 많았고요. "'THE K2' 할 때도 느꼈어요. 분장해주는 분을 꼬셔서 어떻게든 한 번 해보려는 신이었는데, 원래는 옷을 벗으면서 여유롭게 이야기 하는 설정이었죠. 생각해보니 너무 느끼하고 재미없을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촬영 때 감독님이 말릴 틈 없이 옷을 후루룩 벗고 대사를 쳤어요. 닭살 돋고 소름이 끼칠 수는 있어도 느끼하게 보이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이었죠."
- '구해줘'를 하면서 '왜 한다고 했지?' 후회한 적은 없나요. "그냥 '너무 힘들다' 그 정도였어요. 어떤 기운을 넘어선 연기를 해내야 할 때 저는 반대로 기가 빨리게 되잖아요. 그리고 제가 사이비 교주의 기준이 될 수 있으니까 책임감이 남달랐죠. 예배 신들은 대사만 A4 용지로 다섯 장, 여섯 장이 넘어갔는데 대본 책으로는 25~30페이지 정도 됐어요. 대본을 처음 받고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쉴 수 없었죠. 식구들과 밥 한 번 먹지 못하면서 산 속에 들어가 대본만 봤네요."
- 대본 외우는 곳이 따로 있나요. "5~6년 정도 된 것 같아요. 제가 자주 가는 산 속 공간이 있어요. 아무것도 안하고 24시간 풀로 자다 깨면 대본만 봤죠. 3일이고 일주일이고 시간만 있으면 가서 나오지 않았어요. 개인적 시간은 전혀 없었죠. 그래도 그 만큼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었던 작품이고, 후회없이 즐거울 수 있는 작품이라 열심히 했어요. '진짜 교주 같아요'라는 말에 힘을 얻었고요."
- 끝나고 나서는 좀 쉬었나요. "술 마시고 고기 좀 먹으면서 다시 살을 찌우고 있는데 '병원선' 윤선주 작가님께 특별출연 부탁이 들어왔어요. 나와 주셔야 한다고. 췌장암 걸린 암 환자니까 살을 다시 쪽 빼야하고 하지원 씨 아버지 역할이라 나이도 더 들여 보이게 만들어야 했죠. 4회 출연인데 하루 촬영이면 될 것 같다고 해서 넉넉잡아 2~3일 정도 예상했더니 12일간 거제도에서 감옥살이 했네요.(웃음) 고구마만 먹으면서 살았어요."
- 사기 아닌가요.(웃음) "인연이 깊어 거절할 수 없었어요. 하지원 씨와는 '황진이'를 함께 했고, 윤선주 작가와는 '황진이' '대왕세종' '한반도'까지 같이 했거든요. 정이 있으니까요."
- 백정기 캐릭터가 워낙 강해 이미지가 크게 남을 것 같아요. "남아 줘야죠. 제임스 딘에게 남은 캐릭터가 있고, 히스 레저에게 남은 작품이 있고, '아이언맨'하면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떠오르듯이 조성하에게도 남는 작품과 캐릭터가 있다는걸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송강호라는 배우가 남긴 작품이 엄청 많잖아요. 하지만 우리가 그 배우를 보면서 불안해 하지는 않죠. 남는 것 보다 또 다른 도전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오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 여전히 불안한 마음이 있나요. "제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 불과 10년이에요. 신인배우죠. 2006년 '황진이'를 통해 알려졌으니까 아직 파릇파릇한 신인이란 말이에요. 근데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엄청 오래된 줄 알아요. 작품 수에 비해 임팩트를 남긴 캐릭터가 그래도 많기 때문이겠죠. 남자들에게는 '황해' 여자들에게는 '왕가네 식구들' '욕망의 불꽃' '성균관 스캔들' 등 여러 작품들이 있을거예요. '구해줘'가 또 하나의 꼭지점을 찍어준 느낌은 들지만 다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죠."
- 중년배우의 고민일까요. "한국에서 중년 배우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많이 없어요. '선택을 해야 하는가, 선택 받아야 하는가' 이 문제에 늘 봉착해요. '왜 우리는 그렇게 많은 세월 한 직종에 종사해 왔으면서도 주도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가. 사회적 구조 안에 끌려만 다니는 것이 답인가' 싶죠. 어쩔 수 없다면 끌려 가야해요. 하지만 '구해줘'라는 작품을 통해 다양성이 보여졌듯 그런 작품이 또 탄생하지 말란 법도 없죠."
- 배우들은 늘 '활용되고 싶다'고 말해요. "어느나라 배우 보다 잘할 자신 있거든요. 나이를 많이 먹어 그 만큼 깊어진 내공이 있다면 그걸 폭발적으로 뽑아낼 수 있는 작품도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미국·영국에는 리암 니슨·콜린 퍼스 같은 배우들이 활발히 활동하잖아요. 한국은 왜 늘 똑같은 방식으로만 배우들을 소비하려고 하는지 생각해 볼 시간이지 않을까요."
- 스스로 어떤 배우라 생각하나요. "주문형 제작 방식 시스템에 걸맞는 맞춤형 배우요.(웃음) 전 매번 작품을 할 때마다 감독·작가님들로부터 '이런 역할 이렇게 연기해 주세요'라는 주문이 들어와요. '저기서 했던 것 여기서 똑같이 해주세요'라 아니라 늘 다른걸 원하죠. 조성하를 만나면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나봐요. 좋은 현상이에요."
- 이번 작품으로 또 인기스타가 됐어요. "아까도 해운대 비프빌리지 야외무대 인사에 다녀왔는데 1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관객 분들이 앉아 계시더라고요. 너무 재미있어요. 다른 분들 이야기 하실 때 사이 사이 하트를 날려 드렸죠.(웃음) 길거리를 걸어도 저만 보면 '될지어다, 될지어다' 하세요. 사실 그 대사는 제 대사가 아니에요. 신도들이 저에게 하는 말이죠. 그저 감사해요."
- 무엇보다 어린 연령대의 팬들이 많아졌어요. "젊은 분들은 무조건 '교주님!'이라고 불러요. 이름이 교주님이 됐어요. 사진 요청을 할 때도 '안수기도 해주는 포즈로 찍어 주세요'라고 부탁해요. 그럼 그 안수기도를 받고 너무 행복해 하는 거예요. 우리 신도들이 행복해 한다면 제 몸 하나 정도는 얼마든지 활용해 드리죠.(웃음) 냉정한 둘째 딸 반응도 확연히 달라 신기했어요."
- 어땠나요. "중학교 2학년인데 얘는 진짜 냉정한 아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냉정' 하면 얘라고 할 정도였죠. 평소에는 아빠가 TV에 나와도 자기가 보고 싶은 채널로 휙휙 잘 돌렸어요. 그렇다고 본인의 취향이 있는데 '왜 아빠 하는 것 안봐?'라고 할 수 없죠. 근데 '구해줘'는 시작하자마자 '몇시에 하냐'고 묻더니 아주 푹 빠져서 보는 거예요. TV 앞에 먼저 앉아서 난리가 나요. 원래 뜨는 드라마의 악역만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는데 이번에는 그게 아빠인거죠. 뽀뽀하고 친구들에게 자랑하면서 아빠 사인 받아준다고 좋아하니까 정말 감사하고 행복하더라고요."
- 왜 모두가 나를 주목하고 있을 때 가장 조심해야 한다고 하잖아요. "제가 받는 주목도는 주목도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딱히 조심해야 할까요? 혹시나 싶으면 안수기도 해드리죠.(웃음) 솔직히 조심이라는 것도 뭔가 무너질 것이 있을 때 해야 하는 것 같아요. 전 어차피 천천히 올라왔던 사람이고 지금 무너져도 바닥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거든요. 초심에서 시작해 초심에서 끝나는 사람이라 생각하니까 조심보다는 나를 반겨주는 사람들에게 보답을 해주는 것이 더 맞다고 생각해요."
- 가끔은 귀찮거나 싫을 때도 있을텐데요. "전혀요. 저 외로운 사람이에요. 사랑받고 싶어요.(웃음) 남들이 하는 말? 두렵지 않아요. 대중매체를 통해 대중에게 알려지고 인기를 얻는다면 당연히 다시 보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랑해 주는 것을 귀찮아 하고 피곤해 하는건 교만 내지는 성의를 폄하하는 거죠. 그럼 아예 순수 예술을 해야지. 길 가는데 알아 본다? 환영해주면 나도 같이 환영해 드리면 돼요. 없어 본 사람은 알아요. 10원 한 푼도 귀하다는걸. 10년에 걸쳐 믿음을 샀는데 그걸 왜 거부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