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A 두산의 2017 한국시리즈 1차전이 열린 지난 25일 광주 기아 챔피언스필드. 오후 6시 30분에 맞춰 시구자가 마운드에 등장하자 관중석을 가득 채운 2만여 팬들이 환호했다. 문재인(63) 대통령이 한국 야구 국가대표팀 파란 점퍼를 입고 손을 흔들며 등장했기 때문이다. 예고 없이 등장한 문 대통령의 시구에 박수와 환호를 쏟아냈고 경기를 앞둔 선수들도 깜짝 놀란 표정으로 '대통령의 시구'를 지켜봤다. 극비리에 펼쳐졌던 문 대통령의 '한국시리즈 시구 작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순간.
'야구 열기' 속 역대 5번째 대통령 시구
'대통령의 야구 시구'는 낯선 장면이 아니다. 역대 대통령으로는 5번째, 횟수로는 7번째(김영삼 3회) 시구자다.
스포츠 정책에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쏟았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4년과 1995년 한국시리즈 1차전, 그리고 1995년 정규시즌 개막전 등 총 3번이나 시구를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 한국시리즈는 아니었지만 2003년 대전구장에서 열린 올스타전에서 시구자로 나섰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8년 정규시즌 개막전 시구 예정이었으나 사전에 정보가 유출돼 경호상의 문제를 이유로 취소됐다. 대신 2011년 9월 잠실구장을 방문해 가족과 함께 경기를 관전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한국 대표팀의 친선경기에서 시구를 했던 이승만 전 대통령. 프로야구 창설 전 고교야구 시구에 나섰던 박정희 전 대통령까지. 역대 대통령 12명 중 절반 이상이 마운드를 밟아본 셈이다.
16대 노무현 전 대통령부터 19대 문재인 대통령까지 최근 임기를 지낸 4명의 대통령이 모두 프로야구 시구자로 나섰다는 건 의미가 각별하다. 한국 프로스포츠를 대표하는 인기 종목임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 정규시즌의 대미를 장식하는 '한국시리즈'는 대통령 시구와 꽤 어울리기도 하다.
지켜보는 축구는 속만 쓰릴 뿐
대통령의 발길이 꾸준히 야구장으로 향하는 사이, 축구계는 남몰래 아쉬운 한숨만 쉴 뿐이다. 축구는 대통령이 시축자로 나서는 장면을 보기 힘들다. 과거엔 그렇지 않았다.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 심심찮게 '대통령의 시축' 장면을 볼 수 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1995년 6월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 개막전과 1996년 5월 한국과 유벤투스의 친선경기에 시축자로 나서며 축구 사랑을 뽐낸 바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만 해도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개막전을 비롯해 한국의 전 경기를 지켜보고 일본까지 날아가 결승전을 참관하기도 했다. 그 뒤 축구장에서 대통령들의 모습을 보긴 어려워졌다.
최근 축구에서도 대통령이 시축자로 나설 기회는 있었다. 올해 5월 한국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U-20) 월드컵 코리아 2017 당시 대회 조직위원회는 문화체육관광부를 통해 문 대통령의 개막전·결승전 참석 여부를 협의했다. FIFA 주관 대회이자 월드컵 다음으로 전세계가 주목하는 '미니 월드컵'인 만큼, 신임 대통령이 전세계 축구팬들에게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상황. 성사 가능성은 높아 보였다. 실제로 개막전이 열린 5월 20일 당일까지만 해도 문 대통령이 한국과 잉글랜드의 경기가 열리는 전주를 방문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의 U-20 월드컵 개막전 참석과 시축은 여러 가지 상황을 검토한 청와대의 판단으로 불발됐다.
한 축구계 관계자는 "우리도 한국시리즈 같은 대회가 있으면 대통령이 시축을 하러 오지 않겠느냐"는 말도 한다. 그러나 '한국시리즈 같은' 대회의 권위가 문제가 아니다. 당장 관중들이 찾지 않는 경기장 아닌가. 이 곳에 대통령을? 야구를 마냥 부러워하기보다 프로축구, 더 나아가 한국 축구 브랜드 경쟁력이 낮아졌다는 사실을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
리그의 인기를 끌어올리고 한국 축구의 경쟁력이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얘기다. 그라운드 시축에 나서는 대통령 모습도 그때 볼 수 있지 않을까. '불러도 오지 않는' 축구장이 아니라, '부르지 않아도 찾아오는' 축구장을 만드는 것. 협회와 연맹의 의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