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혔던 포수 무릎이 펴진다. 미트는 타자 어깨 근처까지 올라가고 투수의 공은 스트라이크존 상단을 웃돈다. 타자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린다. 볼이 뻔한 공임에도 배트를 내기도 하지만 미동조차 없을 때도 있다.
하이 패스트볼. 현장 선수들은 주로 '인 하이'라고 표현한다. 구사 타이밍은 보통 투수가 유리한 볼카운트(0-2 또는 1-2)다. 타자는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 히팅 포인트를 뒤쪽에 두고 변화구에 속지 않으려는 태세를 취하는 편이다. 이때 빠른공을 던져 의표를 찌른다. 미끼도 던진다. 배트가 쉽게 끌려 나오도록 눈높이에 가까운 타점으로 조준한다. 머리는 부정해도 몸이 반응한다.
손승락 "하이 패스트볼, 또 하나의 구종"
국가대표 포수 강민호(삼성)는 하이 패스트볼을 '위닝샷'으로 잘 활용한다. 롯데 소속이던 지난 10월, NC와 준플레이오프에서는 종종 원 스트라이크에서도 사인을 냈다. 강민호는 "공격적인 성향이 짙은 상대 타선의 배트를 유도하려고 했다. 꼭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만 사인을 내는 게 아니다"고 전했다.
'타자는 눈높이에 가까울수록 더 쉽게 배트를 낸다'는 이론을 적용했다. 자신이 타석에 나설 때도 공략할 때마다 어려움을 겪던 공이다. 볼 배합도 다양해진다고 본다. 강민호는 "요즘 투수들은 포크볼이나 체인지업 같은 떨어지는 공을 잘 구사한다. 하지만 타자의 대처력도 좋아졌다. 다른 로테이션을 공략할 필요도 있었다"고 전했다. 이어 "실제로 손승락 선배는 '직구 계열의 구종이 한 개 더 늘어난 것 같다'고 하더라. 분명히 효과가 있는 공이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젊은 포수들도 유용하게 활용한다. 최재훈(한화)은 상대 타자의 성향을 고려한다. 그는 "높은공에 약점을 보이는 타자와 승부에서 통하는 공이다.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 인 하이를 활용할 때가 있다. 또 커트 능력이 좋은 타자와 승부에서 파울이 늘어날 때 허를 찔러 보려는 의도로 사인을 내기도 한다"고 전했다. 지난해 롯데의 백업 포수를 맡았던 김준태(상무)도 "인 하이는 정타가 나오기 어려운 공이다. 불리한 볼카운트에서 파울을 유도할 때 통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구단 차원에서 하이 패스트볼을 선호하기도 한다. LA 다저스가 대표적이다. 지난 5월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mlb.com)는 통계전문가 마이크 페트리엘로의 칼럼을 빌려 다저스 불펜진의 성향을 소개했다. 하이 패스트볼의 구사 비율은 12%를 기록했다. 리그 평균은 5%에 불과하다. 2위 보스턴도 8%가 채 안 된다. 소속 투수 로스 스트리플링·조시 필즈·크리스 해처는 개인 순위 1~3위에 오르기도 했다.
앤드류 프리드먼 다저스 사장이 단장으로 부임한 2015시즌부터 하이 패스트볼 구사 비율이 크게 높아졌다는 평가다. 프리드먼 사장은 높은공의 피안타율이 더 낮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당시 다저스 불펜진은 평균자책점 1위를 기록했다. 이후에도 견고했다.
유승안 감독 "의미 없는 공"
하이 패스트볼을 회의적으로 보는 시선도 있다. 전형적인 볼 배합의 연장선이라는 의미다. '포수 조련사'로 인정받고 있는 유승안 경찰야구단 감독은 "의미 없는 공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효과가 미미하다는 것. "좋은 타자라면 터무니없이 높은공에 배트를 내지 않는다. 어설픈 높이로 들어가면 장타로 연결될 수도 있다. 의도가 유인이라면 낮은 코스가 바람직하다. 투 스트라이크 이후엔 대개 공을 한 개 (스트라이크존 밖으로) 뺀다. 그러다 보니 생각 없이 사인을 내는 포수가 있다"고 일갈했다.
의도를 드러내는 것도 문제다. 유 감독은 "인 하이 사인을 낸 뒤 살짝 일어나서 포구 자세를 취하는 포수가 있다. 투수의 제구에 도움이 되려는 의도는 좋다. 하지만 이 경우 심판은 공이 스트라이크존으로 들어와도 대체로 볼로 판정한다. 의미 없는 공을 던진 뒤 볼카운트도 유불리 기로에 놓인다"고 전했다.
양상문 LG 단장도 비슷한 견해를 전했다. 투수의 의도가 뻔히 읽힌다는 것이다. 양 단장은 "하이 패스트볼을 구사하는 볼카운트가 대개 정해져 있다고 볼 때, 타자는 이미 대비하고 있다. 심지어 투구 동작에서 드러나는 투수도 있다. 물론 헛스윙을 이끌어 내는 공도 있지만 대체로 타자에게 혼란을 줄 수 있을 만큼 강한 구위가 동반된 경우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하이 패스트볼을 제대로 구사하는 투수가 많지 않다. 한 포수는 "올 시즌 코칭스태프에서 인 하이 비율을 높여 보자는 주문을 했다. 하지만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투수들이 이 공을 결정구로 사용하는 데 어려움을 토로했다"고 전했다. 하이 패스트볼을 선호하는 류제국(LG)도 "의도대로 던지기 어려운 공이다"고 했다. 김경문 NC 감독은 하이 패스트볼의 위력을 인정하면서도 "제대로 던질 수 있을 때 타자와 승부에서 효과를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무의미한 사인은 지양해야
이종열 SBS Sports 해설위원은 타자의 입장에서 하이 패스트볼에 대한 견해를 전했다. "허를 찌르는 볼 배합이 될 수도, 전형적인 볼 배합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관건은 구위 또는 공 끝의 위력이라고 봤다.
타자는 일반적으로 타석 10m 앞에서 공의 구종과 궤적을 판단하고 스윙한다. 강한 회전이 걸린 그렇지 않은 공보다 덜 낙하한다. 때로는 떠오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박찬호가 전성기에 구사하던 '라이징 패스트볼이 대표적이다. 타자의 히팅 포인트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다수의 타자가 한목소리를 낸다.
포수는 투수의 능력, 주자의 상황 그리고 타자의 성향까지도 두루 고려해 사인을 내야 한다. 평범한 구속과 제구력을 갖고 있는 투수에게 하이 패스트볼을 요구하는 건 한 번의 승부를 버리는 셈이다. '시선을 흐트러뜨린다'는 의도를 보여 준 뒤 요구하는 다음 공의 선택도 신중할 필요가 있다. 주자가 3루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 정타는 아니더라도 뜬공이 나올 확률이 커진다.
하이 패스트볼의 효과에 정답은 없다. 다만 생각 없이 관례로 하는 사인은 지양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