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10월 진해 도천초등학교를 다닐 때의 일이다. 진해경찰서장이셨던 선친은 부임 7개월 만에 충남경비과장으로 좌천되셔서 다시 전주로 이사해야 했다. 모두들 의아해했다. 진해경찰서장에 부임한 서장들은 대부분 영전해 갔기 때문이다.
진해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별장이 있었다. 한 달에 몇 차례 이 전 대통령이 진해에 내려올 때 인연을 잘 맺어 두면 좋은 자리로 승진해서 가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선친은 반대로 좌천을 당했다. 그해 정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진해에서 야당 표가 많이 나온 것이 이유 중 하나였다. 물론 선친의 승진을 시기 질투하는 사람들의 모함도 많이 있었다.
나는 진해가 좋았다. 뭔가 이국적인 도시였다. 커다란 열대 나무가 도심에서 자라고 한겨울에는 싸라기눈만 내려도 사람들이 눈을 구경하려고 거리로 모였다. 봄에 벚꽃이 피면 진해에는 하얀 벚꽃장이 시끌벅적하게 열렸다. 날씨가 더운 탓에 고등학생들은 반바지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녔다.
아름다운 진해를 떠나기란 쉽지 않았다. 선친은 진해에서 각별한 인연을 맺고 계셨다. 마지막 송별회 자리에는 그동안 친분을 나누셨던 분들이 많이 참석해 주셨다. 당시 육군대학 총장이던 이모씨, 공군사관학교 교장이던 신모씨, 해군제독 이모 장군도 계셨다. 선친은 경찰보다 군 관계자들과 뜨거운 석별의 정을 나눴다.
사실 선친이 진해경찰서장으로 근무할 당시 큰 사건이 있었다. 말썽을 부린 해병대 군인들을 체포해 유치장에 감금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경찰과 해병대는 한동안 초긴장 사태였다. 이외에도 진해에 있는 군인들은 원칙대로 처리하는 진해경찰서 때문에 곤욕을 당하는 일이 많았다. 지금도 그 일을 기억하는 해병대 관계자들은 웃으며 “참 대단한 서장이셨어”라고 선친을 회상했다.
그럼에도 선친이 진해를 떠나실 때는 해병대 관계자들이 많이 찾아오셨다. 그리고 또 생생히 기억나는 한 분이 있다. 막 이삿짐을 꾸리고 있을 때 누군가 헐레벌떡거리며 진해 태평동 관사로 뛰어왔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인 내게 “아버지는 벌써 가셨니”라고 물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은 태평동 근방 육군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사단장을 지냈던 그분이 처음 진해에 도착했을 때 선친께서는 직접 하숙집을 알아봐 주시면서 정착을 도와주셨다. 그 인연으로 자주 관사에 찾아오곤 하셨는데 그날 편지가 들어 있는 노란 봉투를 아버지에게 건네시며 “차 서장, 정들자 이별이라더니”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진해에서 만난 분들은 훗날 신군부 중심 세력이 되셨다. 만약 선친께서 공주경찰서장 때 돌아가시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셨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진해 태평동에서 전주 태평동으로 이사를 와 다시 전주초등학교 4학년 때는 진해를 향한 그리움으로 마음이 헛헛했다. 그러던 어느 날 태평동 뒷산에 올랐다. 전주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진해도 아름답지만, 내 고향 전주도 아름답구나’라고 생각하며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전주를 바라보는데 어디선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같이 살던 사촌 형들이었다. 해가 질 때까지 들어오지 않자 없어진 줄 알고 한참 동안 나를 찾았다고 했다.지금도 “집으로 가자”고 했던 형들의 목소리가 귀에 아른거린다. 호전되지 않은 건강 상태를 매일 접하며 이제는 돈
·명예
·욕망 등 세속적인 감정을 모두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가 계신, 나의 내면이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