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유명했던 노래를 리메이크해서 경연하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옛날에 좋아했던 노래를 요즘 감성으로 재해석한 노래를 들으면 또 다른 감동이 찾아온다. 구명시식도 벌써 30년이 넘어간다. 구명시식은 리메이크할 수 없지만 구명시식을 올렸던 사람들은 세월이 흘러 다시 찾아오기도 한다.
의사는 환자가 아닌 환부를 보고 기억한다고 한다. 나도 구명시식을 신청했던 사람이 아닌 사연을 보고 기억한다. 그중에는 절대 잊을 수 없는 구명시식이 있다. 1986년 후암동에 처음 선원을 열었을 때 일이다. 어느 날인가 중년의 L모 여인이 찾아왔다. 그녀는 자신을 시한부 환자라고 소개했다.
“뇌종양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있어요. 손에 마비도 왔어요. 점점 종양이 커지고 있대요.” L씨는 생의 마지막이 보이는 듯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여관을 운영했지만 뇌종양 판정을 받고 모든 재산을 정리했다. “법사님은 영혼을 보신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좋은 곳으로 떠날 수 있게 도와주세요.”
너무 간절한 소원이었다. 그 당시는 혼자서 모든 것을 해야 할 때라 한참 숨을 고른 뒤에 큰 결정을 내리게 됐다. “제가 한번 구명시식을 해 보겠습니다. 옛날 고승들은 병을 고쳐 주는 구병시식을 했습니다. 저는 목숨을 구하는 구명시식을 해 보겠습니다.”
L씨는 우리 집안과 큰 인연이 있었다. L씨 아버지는 6·25 때 돌아가신 전투경찰이었는데 선친의 부대 대원이었다. 전사가 아닌 총기 오발 사고로 돌아가셨지만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 그녀는 아버지 없이 험난한 인생을 살다가 중년이 되면서 여관업으로 막 돈을 벌던 참이었다. 그때 뇌종양 판정을 받은 것이다.
구명시식이 시작되자 L씨는 계속 눈물을 흘렸다. 그 순간이었다. 구명시식 도중에 갑자기 검은색 형체가 그녀의 몸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목격했다. 왠지 안심이 됐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수술하기엔 늦었다고 하겠지만 병원에 가면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며칠 뒤에 L씨는 환하게 웃으며 다시 선원을 찾아왔다. “법사님, 오진이랍니다. 뇌종양이 아니라 물혹이었습니다.”
30년 전에는 정밀하게 볼 수 있는 의료 기술이 발달되지 않아 오진이 많았다. 그런데 마냥 기뻐할 줄 알았던 L씨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왜 그러세요? 뇌종양이 아니면 오래 살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L씨는 “기쁘긴 한데 제가 여관을 팔아서 아는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 주고 빚잔치를 해서요. 이제 뭐 하면서 먹고살아야 하죠?”라며 걱정했다. 나는 웃으며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관을 정리해 좋은 일에 쓰셨으니 또 한 마을이 있을 겁니다”고 했다.
3년 뒤 그녀는 일본에서 돈 많은 노인을 만나 재혼했다. “법사님, 일본에 꼭 놀러 오세요.” 그녀는 나를 일본에 초대했다. 뇌종양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았을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일본에서 신데렐라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내가 다 기뻤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얼마 전이었다. 그녀의 딸이 일본에서 찾아왔다. “어머니는 후암동에서 구명시식을 받은 뒤에 30년 가까이 더 사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일본에서 임종하기 전에 법사님께 전달해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딸이 전하는 얘기를 들으니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첫 구명시식의 시작은 단출했지만 영적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 강했다. L씨의 뇌종양은 과연 오진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