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배우 고(故) 김주혁이 영화 '흥부(조근현 감독)'로 다시 세상과 만난다. 유작 '흥부' 속 김주혁은 슬프지만 아름답게 빛난다.
오는 2월에 개봉을 앞둔 '흥부'는 지난 9일에 제작보고회를 열어 고인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붓 하나로 조선 팔도를 들썩이게 한 천재 작가 흥부가 남보다 못한 두 형제로부터 영감을 받아 세상을 뒤흔든 소설 '흥부전'을 집필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김주혁이 맡은 역할은 두 형제 중 동생인 덕망 높은 양반 조혁. 우리가 알고 있는 어질고 따뜻한 흥부가 영화에선 곧 조혁이다. 정진영이 조혁의 형 조항리 역을, 정우가 천재 작가 흥부를 연기한다.
'흥부'는 지난 8월 말에 촬영을 완료했다. 고인이 사고를 당하기 두 달 전이다. 김주혁은 '흥부' 후반 작업 중이던 10월 30일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사인을 두고 여러 가지 가능성이 제기됐지만 정확한 사고 원인과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영화 '독전(이해영 감독)'과 함께 '흥부'는 김주혁에게 작별 인사조차 하지 못한 팬들을 향해 남겨진 선물과 같다.
조근형 감독은 김주혁 캐스팅 과정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고인과 작업은 "행복한 고통"이었다. 그는 "한 번쯤은 꼭 함께 작업해 보고 싶은 배우였는데, 어느 날 기적처럼 만났다. '정말 한 번 해 보고 싶었다'고 솔직히 마음을 전했다. 당일 결심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착한 조혁 캐릭터는 평면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이어 "한창 각색을 하고 있는데 이른 아침 8시께 혼자 영화사를 찾아왔더라. '담배 한 대 같이 피우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얼굴이 상기돼 있기에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밤을 꼴딱 새웠다'고 했다. 둘이서 담배를 피우며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리곤 벌떡 일어나 가겠다고 하더라. '왜 가냐'고 물었더니 '감독님이 아무 이야기도 없어서 가겠다'고 답했다. 당시엔 서로 조심했던 것 같다. 이때다 싶어서 '같이합시다'라고 했더니 '예'라고 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그렇게 시원하게 약속을 하고선 굉장히 집요하게 캐릭터를 파고들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흥부를 연기하며 고인과 가장 많은 호흡을 맞춘 정우에게 김주혁은 용기였다. 정우는 데뷔 17년 만에 생애 처음으로 사극에 도전한다. 김주혁이 조혁이기에 흥부가 됐다. 김주혁은 "조혁이라는 역할을 김주혁 선배가 한다는 말을 듣고 도전하겠다는 용기를 얻었다"면서 "김주혁 선배 기억이 많이 난다. 후배인 나를 안아 주고 지켜보고 응원해 줬다. 아직 편집 과정이긴 하지만, 영화 마지막에 조혁이 흥부에게 하는 내레이션이 등장한다. 그 메시지, 말들, 김주혁 선배의 목소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밝혔다.
사고를 당하기 전 김주혁은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한때 로맨틱 코미디의 단골 배우였던 그는 지난해 영화 '공조'를 통해 날카롭고 거친 눈빛의 악역을 연기해 호평을 받았다. tvN 드라마 '아르곤'을 통해서는 신념을 강하게 지키는 언론인을 그리며 또 한 번 연기 변신에 성공했다. 제1회 더 서울어워즈에서 '공조'로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면서 "연기 생활을 한 지 20년 만에 영화로는 상을 처음 타 본다. 악역을 향한 갈증이 있었다"는 감격 어린 소감을 남겼다. 2018년에도 다작이 예정돼 있었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죽음은 믿기 힘들 정도로 갑작스럽다. 그가 평생을 바쳐 온 영화 속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흥부'에서 김주혁의 형 조항리를 연기한 정진영은 동생 김주혁을 기리며 "(김)주혁이는 영화 속에서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 관객분들도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