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선수협)는 지난 18일 KBO 리그 선수 대리인 91명을 공인해 그 명단을 KBO에 통보했다. 지난해 12월에 진행된 에이전트 자격 시험과 심사에 210명이 응시했고, 91명이 최종 합격했다. 이들은 다음 달 1일부터 공식적으로 프로야구 선수 대리 업무를 시작할 수 있다. 선수협이 제시한 표준 선수 대리인 계약서에 의거해 선수와 계약해야 하고, 향후 선수협 선수 대리인 규정에 따른 규제를 받게 된다.
공인 에이전트 91명 가운데 39명은 국내 변호사다. 21명이 변호사 시험, 18명이 사법 고시를 각각 통과했다. 일본 변호사 1명과 미국 법학 석사 1명, 법무사 3명까지 포함하면 법 관련 인물 수는 총 44명. 비율이 절반에 육박한다. 스포츠 산업 종사자는 17명에 불과하고, 일반 회사원 14명과 보험 설계사 2명, 의료계 종사자 2명이 뒤를 잇는다. 선수협은 예상보다 공인 에이전트 수가 많아진 데 대해 "대리인 자격을 개방했고, 변호사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유독 변호사 합격자가 많은 이유가 있다. 에이전트 자격 시험 내용이 법을 공부한 사람에게 유리하다. 자격 시험은 총 네 과목으로 구성된다. ▶ 1과목은 KBO 리그 대리인 규정, 표준 선수 대리인 계약서 ▶ 2과목은 KBO 규약(부속 선수계약서 포함), 협정서(한-미, 한-일, 한-대만, 프로-아마추어), 야구선수 계약서 ▶ 3과목은 KBO 리그 규정, KBO 기타 규정(상벌위원회 규정, 야구배트공인 규정, 국가대표 운영 규정 등) ▶ 4과목은 국민체육진흥법, 프로스포츠 도핑 규정, 선수협회가 지정한 법률 상식으로 나뉜다. 모든 과목에서 60점 이상을 받아야 하고, 단 한 과목이라도 60점을 넘지 못하면 탈락한다. 선수협 관계자는 "일반 지원자들은 KBO 규약집에 나오지 않는 4과목에서 대부분 낮은 점수를 받았다. 반대로 법 관계자들은 4과목에서 강점을 보였다"고 했다.
변호사들에게 새로운 '시장'이 필요하기도 하다. 법학전문대학원이 도입되면서 변호사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고, 대형 로펌 소속이 아닌 변호사들은 수임에 어려움을 겪는 일이 많았다. KBO 리그는 대리인 1명(법인 포함)이 총 15명(구단당 3명)까지만 선수를 보유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성이 넓게 열려 있다. 최근 선수의 몸값이 높아진 것도 대리인에게는 호재다. 에이전트들은 선수들의 연봉과 대외 활동 계약을 대리하고 수수료를 받는다. 수수료는 통상 3%에서 7% 사이에 책정된다. 4년 총액 100억원의 계약이 성사되면 에이전트가 최소 3억원은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추신수가 텍사스와 7년 총액 1억3000만 달러(약 1390억원)에 계약할 때, 에이전트인 스캇 보라스는 5%에 해당하는 650만 달러(약 69억원)를 챙겨 갔다.
사실 보라스 역시 변호사 출신이다. 야구선수였던 그는 마이너리그에서 무릎 부상으로 은퇴한 뒤 대학에 진학해 약사 자격증을 땄다. 졸업 뒤 맥조지 로스쿨에 진학해 법학 석사 자격을 얻었다. 한동안 의료 소송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다 선수 시절의 경험과 인맥을 살려 1980년부터 야구 에이전트를 시작했다.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계약을 성사시키는 슈퍼 에이전트로 자리 잡으면서 자신의 '고객'들은 물론이고 스스로도 돈방석에 앉았다.
국내 구단들은 지금까지 선수 대리인 제도 도입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 왔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실질적으로 에이전트 역할을 하는 인물들이 늘어났다. 수년간 엄청난 금액의 FA 계약을 이끌어 낸 선수들은 대부분 비공식 대리인이 구단과 협상을 진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차라리 '공식적'으로 에이전트 제도를 도입하는 게 낫다는 목소리가 나온 이유다. KBO 리그에 대거 유입된 변호사들은 앞으로 어떤 변화를 이끌어 낼까. 일단 주사위는 던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