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첫 올림픽의 마지막 무대를 연기하고 들어온 민유라(23)는 흥분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올림픽이 주는 긴장과 부담, 압박 같은 것들은 모두 잊은 표정이었다. 4년에 한 번,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들에게 허락된 특별한 무대. 바로 그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한복을 입고 '아리랑'을 울려 퍼지게 만든 민유라-알렉산더 겜린(25) 조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민유라-겜린 조는 20일 강릉 아이스아레나에서 열린 2018 평창겨울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아이스댄스 프리댄스에서 기술점수(TES) 44.61점, 구성점수(PCS) 41.91점을 합쳐 86.52점을 받았다. 전날 쇼트 댄스 점수 61.22점을 더한 총점은 147.74점. 메달권은 아니지만 한국 피겨 아이스댄스 역사를 새로 쓰는 의미 깊은 무대였다.
이날 연기를 마지막으로 민유라와 겜린의 평창겨울올림픽 무대는 끝났다. 열심히 달려온 만큼 홀가분하고, 이제 푹 쉬고 싶다는 말이 나올 법 했다. 하지만 민유라는 올림픽을 마친 소감에 대해 묻자 "너무 아쉽다"며 "다시 들어가서 연기하고 싶다"는 대답을 내놨다. 처음으로 맛본 올림픽의 여운이 길게 남아있는 모습이었다.
그건 아마도 민유라와 겜린, 둘 모두에게 올림픽이란 무대가 갖는 의미 때문일 것이다. 피겨 불모지였던 한국은 '피겨여왕' 김연아의 등장으로 인해 인지도도 높고 선수들도 많은 종목이 됐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남녀 싱글에 한정된 인기였고, 페어나 아이스댄스 같은 종목은 여전히 인기도, 선수도 없었다. 페어의 경우 종목 특성상 싱글에서 전향하는 선수들이 간간히 있었지만 아이스댄스는 그마저 없어 민유라는 파트너를 구하는 것조차 애를 먹었다.
국내에선 도저히 파트너를 구할 수 없어 외국으로 눈을 돌렸다. 어렵게 구한 파트너도 오래가지 못해 좌절하고 있을 때 같은 코치 밑에서 훈련하던 겜린과 상황이 맞았다. 겜린은 쌍둥이 여동생과 함께 아이스댄스를 하고 있었는데 2015년 여동생이 은퇴하면서 짝을 잃었다. 여동생의 은퇴와 비용 문제 등까지 겹쳐 피겨를 그만둘까 고민하고 있을 때 민유라의 제안을 받았고 둘은 곧 의기투합했다.
여러 가지 어려움도 있었지만 마침내 평창까지 온 이들은 매 순간, 모든 무대를 행복하게 즐겼다. 점수나 성적, 결과보다 함께 아이스댄스를 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올림픽에 나설 수 있다는 사실이 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귀화까지 선택하며 올림픽에 나선 겜린은 쇼트 댄스를 마친 뒤 취재진과 만나 소감을 밝히다가 슬며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이 이들의 마지막 올림픽인 것은 아니다. 민유라와 겜린은 일찍부터 4년 뒤 베이징을 준비하고 있었다. 문제는 훈련 비용이다. 훈련을 위해선 매년 20만 달러(약 2억 1000만원)에 가까운 비용이 들어가는데, 지원금은 적고 스폰서나 매니지먼트사도 없어 민유라-겜린 조는 대부분의 비용을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
민유라와 겜린이 미국 온라인 모금 사이트인 '고 펀드 미'에 자신들의 사연을 올린 것도 이 때문이다. 이들은 '민-겜린 한국 선수 펀드(https://www.gofundme.com/mingamelinkorea)'라는 이름으로 2016년 12월부터 모금을 받고 있는데 아쉽게도 현재 모금액은 전체 5만 달러(약 5400만원)의 1/10 수준인 5800달러(약 620만원)이다.
민유라는 "한국에는 아이스댄스 지도자가 많지 않다. 은퇴한 뒤에는 겜린과 함께 한국에서 아이스댄스 (선수들을)키우고 싶다고 1, 2년 전부터 생각해왔다"는 포부를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겜린 역시 "올림픽이라는 기회를 준 한국에 보답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평창을 넘어 베이징까지 바라보고 있다. "그전까지는 피겨 선수죠?라고 물어보셨는데 요샌 아이스댄스 하는 사람이죠? 라고 물어보시더라. 많은 분들이 아이스댄스를 알게 된 것 같아 신난다"고 활짝 웃었던 이들의 도전은 베이징까지 계속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