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깊이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깊어질 뿐이다. 지금의 설경구를 있게 한 '박하사탕'은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영원히 설경구의 대표작으로 손꼽힐 작품이다.
24일 서울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는 영화 '박하사탕(이창동 감독)' 디지털 리마스터링 재개봉 기념 시네토크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이창동 감독과 배우 설경구·김여진이 참석해 18년만에 재개봉하게 된 소감과 당시를 회상하며 새로운 이야기들을 전했다.
'박하사탕'은 제4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1999)을 시작으로 칸 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되는 등 세계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걸작이자, 배우 설경구, 문소리를 발굴한 이창동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다.
설경구는 "올해 개봉하는 영화가 없나 싶었는데 '박하사탕'이 재개봉 해 여러분들을 만나게 됐다. 그래서 또 한번 고마운 영화라 생각한다"며 "내가 다른 행사가 있는 배우도 아니고 영화를 개봉해야 관객들을 만날 수 있는데 재개봉을 하고, 이렇게 뵙게 돼 반갑고 고맙고 감사하다"고 진심을 표했다.
이창동 감독은 "네가필름이 다행히 좋은 상태로 남아있어서 4K 디지털로 리마스터링을 하게 됐다. 소리같은 경우는 부산영화제 개막식 버전으로 처음 만들어졌는데, 2000년 1월 1일 재개봉을 하면서 두 군데 녹음실에서 작업을 하다보니 원본이 없어지기도 했다. 때문에 개봉 무렵 상태의 녹음은 좋지 않았다. 이번에도 남은 것은 네가필름과 사운드 소스 밖에 없는데 그것을 다시 만들 수는 없고, 소리를 보충하는 식으로 손을 봤다"고 설명했다.
생의 막장에 다다른 한 중년 남자의 20년 세월을 7개의 중요한 시간과 공간으로 거슬러가는 '박하사탕'은 주인공 김영호의 20년 삶을 관통하는 80년 5월 광주의 트라우마를 통해 개인의 삶을 추동하는 진정한 힘이 무엇인지 방증한다. 이창동 감독과의 첫 만남, 촬영 당시를 떠올린 설경구는 "처음에는 출연을 거절했다. 무서운 영화라 여러 사람 인생 망칠 것 같아서 섣불리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았다"며 "당시 명계남 대표님도 있었고, 감독님 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이 영화에 매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주저했던 작품이었다"고 고백했다.
이어 "그땐 김여진 씨가 유명했고, 문소리와 저는 이름도 없는 무명 배우였는데 감독님이 모험을 하신 것이다. 큰 모험이었다. 천운을 받아 캐스팅 됐다"면서도 "촬영 할 때는 너무 괴로웠다. 매 챕터가 다른 인물 같았다. 고통 속에 하루하루 너무 어려운 숙제를 해결하는 느낌이었다"고 토로했다.
또 "촬영 전에는 아무 생각없이 감독님을 쫓아 다녔는데, 촬영을 시작하고 나서는 감독님 뒤로 다녔다. 인사하기도 싫고 눈 마주치기도 싫고 불편했다"며 "챕터5 때인가. '감독님께 이 말을 안 하면 나머지 챕터 두 개를 못 찍을 것 같다'는 느낌에 사과를 드렸다. '전 하느라고 하는데 이 정도 밖에 안 된다. 감독님이 원하는 것은 더 큰 영혼일텐데 저는 이것 밖에 안 된다. 최선이다'고 사죄했다. 그 정도로 나에게는 힘들었던 영화였다"고 거듭 강조했다.하지만 이에 대해 이창동 감독은 "그때 제가 설경구 씨에게 했던 말이 있다. '현장에 수많은 스태프, 배우들이 있다. 100명 정도가 참여하고 있는데 난 너만 의지하고 가고 있고, 너만 나에게 힘이 돼 주고 있다'고 했다. 단순히 용기를 주기 위한 덕담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고 회상했다.
이창동 감독은 "첫 촬영을 시작할 때부터 촬영에 들어가기 전 만났던 설경구와 전혀 다른 모습을 발견했다. 그냥 영호가 걸어 들어오는 느낌이었다"며 "물론 영화 경험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서, 그리고 자기에게는 크고 어려운 캐릭터라고 이미 받아 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힘들어 했지만, 나에게는 한 장면 한 장면 보여지는 영호의 모습이 놀라움이었다"고 극찬했다.
"다만 '너 참 잘한다' 그런 이야기는 안 했다"고 귀띔한 이창동 감독은 "왜냐하면 이건 내 개인적인 연출론이기도 한데, 배우에게 '잘한다'고 하면 잘한다는 것에 맞추려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설경구라는 미지의, 나도 알지 못하는 잠재력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고 싶었다. '잘한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항상 믿고 있었고 의지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설경구는 '메소드 연기'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손사레를 치며 하는 배우로 "나 스스로는 메소드 연기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한 줄 한 줄 최선을 다 할 뿐이다. 다만 '박하사탕'은 좀 힘들었다. 끝나고 나서도 굉장히 오래 갔다. 난 아직도 '박하사탕'을 못 본다. 오늘도 몇 번 고민을 했다. '일찍 와서 볼까' 했는데 자신이 없더라"고 털어놨다.
그는 "개봉 전 부산영화제에서 개막작으로 상영을 하고 외신기자 분들을 위해 아침 일찍 시사회를 했다. 그 전날 술을 많이 마셨는데도 잠깐 들어갔다 통곡하고 나온 적도 있었다. 그리고 개봉 즈음해서 기자 분들과 인터뷰를 할 때도 '박하사탕' 이야기만 하면 울었다. 나랑 같이 울었던 기자 분들도 많다"고 되내었다.
또 "분위기를 업 시키려고 노래방에 가면 노래 하면서 또 울었다"며 "'박하사탕'은 그만큼 꽤 오래 갔다. 힘들더라. 메소드 연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나에게는 강하게 각인 된, 아직까지도 그런 영화인 것 같다. 뭔가 말하면 울컥 울컥 하려는 것이 있다. 지금도 조금씩 그런데… 그만 하겠다"고 전해 눈길을 끌었다. 물론 이창동 감독이 감독 입장에서 받은 느낌은 달랐다. "철도신 연기를 할 때 안전장치는 다 마련돼 있었지만 설경구 씨가 완전히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여 걱정했다. 이상한 소리를 막 지르면서 흔들리는데 연기가 아닌 것 같았다. 걱정이 돼 스태프에게 '가서 밑을 좀 잡아라. 저러다 떨어지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경구는 누가 밑에 있는지 없는지 의식 못할 정도로 연기를 했다"는 이창동 감독은 "메소드 연기라는 것이 아주 간단히 말하면 그 인물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물의 내면을 받아 들이는 연기 아닌가. 그때만 하더라도 영화를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내 눈 앞에서. 말로만 듣던 내면 연기를 하는 사람을 처음 보고 잇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 자신도 전율을 느꼈다"고 호평했다.
이창동 감독은 "설경구는 이후 배우의 연기라는 것에 대해 하나의 전범을 보여주는 배우가 됐다. 설경구 씨 이후 등장한 많은 배우들에게 큰 영향을 줬다고 생각한다"며 "그런 점에서 '박하사탕'을 통해 설경구라는 배우를 만났던 것이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설경구가 '박하사탕'이라는 영화로 걸어 들어온 것은 어떤 면에서 나의 운명이기도 했고, 영화의 운명이기도 했고, 한국 영화의 운명이기도 했던 것 같다. 특별한 배우라 생각한다"고 아낌없는 애정을 드러냈다.
설경구는 "배우 일을 하면서 '당신의 대표작이 뭐냐'고 물으면 늘 했던 답이 '박하사탕'이다. '지금도 '박하사탕'이고 앞으로도 '박하사탕'이다. 어떤 영화를 찍건 나에게 대표작은 '박하사탕' 일 것이다'는 말을 감히 하고 있다"고강조했다. 영원히 설경구의 대표작이 될 '박하사탕'은 한국 영화에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도 길이 길이 기록될 것이다. 조연경 기자 cho.yeongyeong@jt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