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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의 갓모닝] 705. 경찰 유가족들과 만남
지난 7일 경찰인재개발원에서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경찰순직경찰관 추모 행사를 가졌다. 매년 하는 행사였기에 올해도 경찰 유가족들과 만날 수 있었다. 건강이 좋지 않아 입원한 와중에도 이 행사만큼은 빠질 수 없어 가족과 함께 참석했다.
차일혁홀에서 아버님을 위한 추모식을 올린 뒤, 순직 경찰관 유가족들과 환담회를 위해 장소를 옮기니 반가운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고 안병하 치안감의 유가족들이었다. 경찰인재개발원에는 경찰관의 이름이 명명된 ‘차일혁홀’과 함께 ‘안병하홀’이 있다.
‘안병하홀’의 주인공인 고 안병하 치안감은 한국전쟁 당시 춘천에서 약 3일 동안 적의 남하를 저지하는 공로로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안 치안감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라는 명령을 거부,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고문당한 뒤 강제 직위 해제돼으며, 1988년 순직하실 때까지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셨다고 한다.
2009년 경찰인재개발원의 전신인 경찰종합학교에서 ‘차일혁홀’을 건립할 당시, 학교장은 일부 반대가 있음에도 ‘안병하홀’을 함께 건립했다. 안 치안감이야말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혼란 속에서 경찰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를 목숨을 걸고 소신 있게 보여 준 경찰 중의 경찰이셨다. 안 치안감의 유가족들은 ‘안병하홀’ 건립에 나의 조언이 많은 도움이 됐다는 사실을 당시 학교장이었던 P씨에게 최근에서야 듣고서 환담회장에서 나의 두 손을 꼭 잡고 감사의 인사를 전해 왔다.
한국전쟁 때 경찰관은 4만8000여 명이었다. 그중 공식적으로는 약 1만6000명이, 비공식적으로는 약 2만 명이 순직했다. 포항전투 때는 경찰이 적과 싸우다 많은 수가 전사했다. 한국전쟁 기간에만 경찰 인력의 4분의 1 이상이 전사했다. 육군 다음으로 전사자가 많았음에도 전쟁기념관에는 정확한 전사자 숫자가 나와 있지 않고 주로 행불자로 되어 있으며 흉상 또한 세워져 있지 않다.
한국전쟁 때 전후방을 가리지 않고 많은 경찰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순직한 경찰관들에 대한 처우는 나아지지 않았다. 한 유가족은 손녀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찰이 되고 싶어 했지만 두 번이나 낙방했다면서 안타까워했다. 또 다른 유가족은 호국 경찰에 대한 처우가 낮다며 안타까워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 목숨을 걸고 시민들을 보호했던 경찰관들이 아직도 죄의식 속에 살아가고 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환담회에서는 인상 깊은 이야기가 소개되기도 했다. 2011년 여름 모 경찰서장이 만난 경찰 유가족 할머니의 사연이었다. 6.25 당시, 할머니의 남편은 면사무소 직원으로 일하던 중 경찰관이 돼 잔당 소탕 작전에 투입됐다가 한 달 만에 전사하고 말았다.
이후 어린 자녀들을 홀로 키우며 힘들게 살았던 할머니의 유일한 낙은 매년 6월 관할 지역 경찰관들의 방문을 받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해 바빴던 경찰서장은 6월을 넘겨 7월에 할머니를 찾아뵀지만 안타깝게도 건강이 악화된 할머니는 연명장치에 의존해 침대에 누워 계셨다.
할머니는 경찰서장에게 마지막 힘을 다해 말했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들었다고 한다. 이튿날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경찰서장은 돌이켜 보니 “마지막으로 남편을 만나기 전, 경찰서장을 만나 떠날 수 있어 기뻤습니다”였던 것 같았다고 했다. 70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한국전쟁 때 순직한 경찰관들의 고귀한 희생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청년들이 경찰이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경찰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선배 경찰들의 추모 사업, 유가족들을 위한 지원 사업 등을 제대로 실행하고 있는지 살펴볼 때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