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충북 진천선수촌 트레이닝장. 한국 남자 농구 국가대표 리카르도 라틀리프(29·199cm)는 사진 촬영 장소를 고민하는 기자에게 훈련장 중앙에 걸린 대형 태극기를 가리켰다. 다음 달 18일 개막하는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을 준비 중인 자신의 정체성과 마음가짐이 가장 잘 드러나는 배경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미국 태생의 라틀리프는 지난 1월 법무부 면접을 통과해 체육 분야 우수 인재로 특별 귀화했다. 한국계 혼혈 선수가 아닌 외국인 농구선수로서 한국 국적을 취득한 것은 그가 처음이다. 태극기 앞에 선 그는 셔터 소리에 맞춰 자신감 넘치는 포즈를 취했다. 어색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라틀리프는 "한국은 내게 사랑이다. 다음 달 18일 개막하는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 한국 팬들을 행복하게 해 드리겠다"고 말했다.
귀화 직후 남자 농구대표팀에 발탁된 라틀리프는 지난 2월 중국에서 열린 2019 국제농구연맹(FIBA)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예선에서 최강 중국을 무너뜨리는 데 앞장섰다. 지난 4~5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 통일농구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태극마크를 단 지 불과 반년 만에 남북 교류에 한몫을 담당하는 경험을 한 것이다. 그는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뛸 때) 한국 선수가 된 것이 실감 난다"면서도 "한국에서 오래 뛰었기 때문에 크게 변한 것은 없다. 처음 한국 땅을 밟았을 때처럼 최선을 다하겠다는 생각만큼은 변함없다"고 소감을 밝혔다.
라틀리프는 미국 미주리대를 졸업한 2012년 한국프로농구(KBL)에 데뷔했다. 2015년에 서울 삼성 유니폼으로 바꿔 입고 꾸준히 실력을 쌓았다. 센터로서 큰 키는 아니지만 득점과 리바운드가 빼어나 2m 이상의 외국인 선수들이 득실거리는 골밑에서 살아남았다. 2015·2017년 최고 외국인 선수상을 받으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6시즌 기록은 경기당 평균 18.7득점, 10.4리바운드. 라틀리프는 생애 첫 국제 메이저 종합대회인 아시안게임 출전을 앞두고 있다. 목표는 대한민국에 첫 우승을 안기는 것이다. 그는 "북한에 다녀온 뒤 허재 감독님이 휴가를 주셔서 충분히 쉬었다"면서 본격적인 '우승 모드'에 돌입했음을 알렸다.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누구인지 묻자 중국과 일본을 꼽으며 일본전만큼은 절대 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라틀리프는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전지훈련지가 일본이었다. 당시 모비스 동료들로부터 '유 해브 투 비트 더 재퍼니즈 팀스(You Have To Beat The Japanese Teams-일본팀을 반드시 이겨야 한다)'라는 말을 쉴 새 없이 들었다. 삼성으로 팀을 옮긴 뒤에도 같은 얘기를 들었다"면서 "역사적 배경은 모르지만 한일 관계를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다. 일본과 중국 모두 신장과 슛이 좋은 선수들이 포진해 있지만, 반드시 넘어 금메달을 목에 걸겠다"고 말했다. 그는 허재호에서 '고참급' 선수다. 아시안게임 대표팀 엔트리 12명 중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은 김선형(30) 박찬희(31) 허일영(33)뿐이다. 위기 상황에서 후배들을 끌어 주는 역할도 맡아야 한다는 뜻이다. 라틀리프는 "아직 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참이라는 말이 낯설다"면서도 "나이 많은 선수가 리드해야 한다는 법은 없기 때문에 베테랑의 부담감은 없다. 다만 빠르게 팀에 녹아든 뒤 내가 할 수 있는 플레이로 동료들을 돕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그러면서 그는 "센터치고 큰 키는 아니지만, 신장을 뛰어넘는 플레이를 하겠다"고 덧붙였다.
젊은 팀인 만큼 아직 병역을 해결하지 못한 선수도 많다.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면 병역 특례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라틀리프는 "병역 얘기는 선수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많이 들었다"며 이날 처음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당연히 동료들을 돕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농구 팬들, 대한민국 그리고 동료를 위해 뛰겠다"고 강조했다. '라건아'로 개명 절차도 진행 중이다. 성은 라틀리프의 첫 글자를 따서 ‘라(羅)’ 씨로 했고, 이름은 ‘굳셀 건(健)’과 ‘아이 아(兒)’, 건아로 했다. 라틀리프는 "자카르타에서 '라건아'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금메달을 딴다면 내 농구 인생 가운데 최고의 순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진천=피주영 기자 akapj@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