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추상미가 감독으로 변신했다. 데뷔작 답지 않은 깊이있는 감동으로 관객의 마음을 흔든다. 오는 31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 그의 첫 작품이다.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1951년 폴란드로 보내진 1500명의 한국전쟁 고아와 폴란드 선생님들의 비밀 실화, 그 위대한 사랑을 찾아 남과 북 두 여자가 함께 떠나는 치유와 회복의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극 영화를 만들기 위해 소재를 찾던 신인 감독 추상미에게 이 아이들의 사연이 다가왔다. 처음엔 극 영화 시나리오를 위해 취재를 시작했고, 이 취재 과정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었다. 이 작품은 추상미에게 시작부터 끝까지 우연 같은 운명이었다.
추상미 감독에게 연출이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다. 연기가 그에게 돈을 벌어다준다면 연출은 그에게 꿈과 희망을 선사한다. "명품백을 못 산다는 불편함은 있다"며 너스레를 떤 추상미가 계속 영화를 만드는 이유다.
-언론배급시사 후 반응이 좋았다. "기자 시사가 가장 어려웠다. 많이들 우시더라. 연출작이다보니 영화에 집중하기보다는 관객들의 반응을 보게 된다. 중간에 화장실 가는 분들을 봐도 '집중 안 되시나보다'라고 생각하며 불안했다. 다른 분이 편집하시다가 후반 1년간은 직접 편집했기 때문에 굉장히 예민했다. 자막 까는 일에도 직접 관여했다. 오타가 있더라. 계속 감수를 하는데도 계속 보였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부산영화제 일정은 영화 같았다.(웃음) 태풍이 왔던 당일 시사와 GV 행사가 있었다. 소속사 대표님이 호텔 1층에 내려갔더니 공사장에서 쇠 막대기가 날아왔다더라. 그걸 보고 '우리 못 가겠다'고 생각했다. 영화제 측에서 '상영이 다 취소됐다'고 연락이 왔다. 관객이 한두 분이라도 오면 그냥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지 않나. 정말 미안하더라. 상영은 못 하더라도 인사라도 하기 위해 갔다. 뚫을 수 없는 태풍이 아니었는데, 신앙이 있는 자매들이 뒤에서 기도해줬다. 하하하. 처음엔 갔더니 7명이 입장했다고 하더라. 택시도 다니지 않는 상황이었다. 근데 결국 150명이 와 주셨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눈물이 났다. 연예정보프로그램에서 촬영이 왔는데 지질하게 울어버렸다. 상영관에 들어가서 관객과 대화를 하는데 보셨던 분들이 눈시울이 촉촉해진 게 보였다."
-우연치 않게도 개막작 '뷰티풀 데이즈'도 탈북 여성이 주인공이었다. "'뷰티풀 데이즈'에서 이나영이 맡은 역할이 우리 영화의 인물, 이송과 비슷했다. 이송의 미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고, 희망이 되는 그런 영화더라."
-산후우울증을 겪던 중 이 영화 연출을 결심했다던데. "아이에 대한 애착이 심해지는 산후우울증을 겪고 있었던 때였다. 산후우울증으로 악몽을 계속 꾸고 드라마와 영화를 보면 우리 아이 같은 거다. 과도한 호르몬의 영향으로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 계속 감성적이 되고 슬퍼졌다. 산후우울증 관리를 잘 안 하면 일반 우울증으로 번진다. 그런 상태가 장기간 지속됐던 상황이었다. KBS에서 방송된 다큐멘터리를 봤다. 다큐멘터리 속 그 아이가 내 아이 같았다. 북한 꽃제비라는 단어도 처음 들어본 것 같은데, '정말 이렇게 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보다 더한 수준으로 아사자가 나온다고 하더라. 그런데 그 다큐멘터리가 방송된 후 그 아이가 이미 죽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장편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때였다. 영화의 소재를 찾고 있던 당시에 운명적으로 다가왔다. 출판사에 다니는 후배가 관련 자료를 건네줬다. 당시엔 시국도 그렇지 않아 책 출판을 고민하던 자료였다. 당시 시대적 배경과 다큐멘터리, 생존 교사들의 증언 인터뷰 등이 담겨있었다. 그걸 집에 와서 보다가 정말 감동을 받았다. 1년 반동안 극 영화로 만들기 위해 시나리오를 썼다. 시나리오 리서치를 하기 위해 시작했다가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게 됐다."
-스스로 치유 받았다고. "산후우울증에서 출발했다. 나도 상처의 연대에서 출발한 거다. 우울증을 겪지 못했으면 영화가 거기까지 가지 못했을 거다. 나 또한 굉장히 힘들었는데 영화를 찍으면서 치유됐다."
-자칫 이데올로기 논쟁으로 빠질 수도 있는 소재다. "그래서 중심 잡기가 어려웠다. 사회주의 체제 안에서 일어난 일이고, 당의 명으로 소집된 선생님들이다. 그런데 그 선생님들은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폴란드는 사회주의와 카톨릭이 같이 가는 국가였기에 신앙심이 깊은 분들이었다. 세대와 이념과 종교와 인종을 초월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도한 게 아니라 저절로 그랬다. 폴란드 선생님들이 이 아이들을 품었다는 것 자체가 그렇다. 이것을 배경으로 해야만 프레임을 깨고 초월한 무엇인가를 이야기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게 이 시대에 필요한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옳고 그름에서 출발하고 싶지 않았다. 연민은 옳고 그름을 떠난 것이다. 정의로워서가 아니라 불쌍해서 품은 것이다. 나와 같은 상처가 있기 때문에 품은 거다."
-실제 탈북민 이송이 등장한다. "탈북민들이 처음엔 국정원으로 들어가서 취조를 받는다. 오랫동안 시달린다. 그런 과정을 겪기 때문에 마음의 문을 열기가 어렵다. 이 친구들이 살아온 삶의 루트를 알게 되면서 질문을 하기 더욱 미안해지더라. 폴란드 선생님들을 만나면서 북한에서 왔다고 하니 '65년 전에 만났던 아이들이 생각난다'고 하며 우시면서 이송을 안아줬다. 폴란드 선생님들이 손을 잡아주니 이송도 울었다. 그때부터 본인의 상처를 대면하기 시작했다. 조금씩 자신의 이야기를 하더라. 같이 끌어안고 울었다. 영화에 다 담지 못해 아쉬운 부분도 있다. 탈북청소년들이 겪은 이야기는 상상할 수 없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부끄럽다. 내가 삶에 대해 불만이 있었던 것에 비해 부끄러워진다."
-다른 소재에도 관심이 있나. "남한 고아들이 있었다는 이야기, 폴란드 선생님들과 사랑이야기, 아우슈비츠 같은 홀로코스트에도 관심이 많다. 상처의 연대라는 주제는 같다."
-극 영화가 나온다면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아이들을 또 캐스팅할 계획인가. "그 중 몇명은 가무에 능하다. 노래를 기막히게 잘 부르는 아이들이 몇명있다. 그런 아이들은 (캐스팅해) 재능을 보여주려고 한다. 캐스팅이 확정되면 합숙을 하려고 한다. 남한 아이들과 북한 아이들이 섞이게 만들고 싶다. 사실, 남한 아역 스타들 중에 새침데기 같은 아이들이 많지 않나.(웃음) 같이 어울릴 수 있게 해야 한다."
-계속 연출을 할 계획이 있나. "연출을 전공했다. 3년 투자해서 공부했다. 영화 공부가 쉽지 않은 것인데, 한 건 다 써먹어야겠다. 하하하. 감독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지금 나에게 굉장한 의미가 있다. 세상과 소통하고, 타인에 대한 많은 관심이 생기고, 사회의 이슈와 만나게 된다. 이런 시점에 문화예술이 할 수 있는, 어떤 영향력이 있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런 부분에 관심이 있어 고민하게 된다. 아이를 키우며 시너지를 낸다는 점도 있다. 명품백을 못 산다는 불편함은 있겠지만. 물욕이 없다.(웃음) 지금 만족스럽다. 당분간 이런 삶을 지속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