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야읍 주산(主山)의 능선을 따라 걸었다. 제법 높은 곳까지 오르니 가야금 소리가 들린다. 이런 곳에서 가야금 연주라니, 퍽 과거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다. 가야금은 대가야의 이름을 받은 우리 전통악기로, 화려한 금빛이 생각나는 대가야의 분위기처럼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소리를 낸다.
2018년 만난 오늘날의 대가야는 당시의 정취를 이어 가는 듯 잔잔했다. 온 동네가 평화롭고 고즈넉해 마음까지 차분해지는 경상북도 고령에 다녀왔다. 능선을 따라 걷는 ‘왕의 길’ 지산동 고분군
고령군 대가야읍을 감싸는 주산의 남동쪽 능선을 따라 걷는 길을 고령은 ‘왕의 길’이라고 부른다. 길을 따라 오르면 크고 작은 왕들의 무덤이 길을 따라 자리 잡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주산 삼림욕장 방향에서 출발한 왕의 길 초입은 가파른 경사로 시작된다. 왼편에 있는 꼿꼿한 대나무가 눈길을 사로잡고, 오른편에는 봄날에 특히 화려함을 내뿜는 벚나무가 진을 치고 등산로를 지킨다. ‘주산성’ 팻말을 따라 오르다 보니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말수가 줄어든다. 완연한 가을에도 햇살에 땀이 맺힐 즈음에 주산 약수터가 나오니, 물 한 모금으로 숨을 고를 수 있는 즐거움과 마주할 수 있다.
조금 더 올라 푸르른 주산 능선을 따라 완만한 트레킹 코스가 보이면, 주산성과 마주한다.
‘고령 주산성’은 대가야 읍내를 서편에서 병풍처럼 감싸는 주산 정상부를 둘러싼 길이 1788m 대가야시대의 산성이다. 주산 정상은 가야산·성주성산·구미 금오산·대구 팔공산·합천 방면까지 조망이 가능해 과거 신라와 대치 관계에 있어 그 동향을 살필 수 있는 주요 지점으로 쓰였다. 지금은 암반을 깨서 성돌을 만들어 구축한 이 석축산성의 발굴된 일부만 눈에 담아 가는 것이 전부지만 말이다.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가면 봉긋 솟은 언덕에 나무 한 그루가 보이는데, 서울 올림픽공원에 있는 ‘나홀로나무’만큼이나 사진을 찍기에 좋은 지점이었다. 하지만 이 나무가 자란 곳은 동산 같은 고분이니, 오르는 것은 삼가야겠다.
고령의 나홀로나무가 있는 가장 높은 곳의 고분은 제1호 지산동 고분이다. 이 1호 고분을 만나야 이후 고분 사이를 걷는 진짜 ‘왕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트레킹 코스는 한국관광공사가 전통문화 콘텐트 중 하나로 선정한 곳이기도 하다.
자그마치 여기부터 700여 개의 고분이다. 꼭대기 1호 고분에서 내려다보면 크고 작은 고분이 눈앞에 펼쳐지지만, 보이는 것은 극히 일부일 뿐이다. 주산의 남동쪽 능선과 가지능선을 따라 줄지어 대형분이 축조돼 있고, 경사면에 중소형분이 밀집돼 있어 가야 지역 최대 규모 고분군을 조성하고 있다.
가장 처음 발굴된 고분은 1977년 지산리 44호 분과 45호 분이다. 이후 대가야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며 당시의 ‘순장’ 문화가 밝혀지기도 했다.
고령군청 관계자는 “순장이라고 하면 산 사람을 강제로 묻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사실 따져 말하면 산 사람을 죽인 뒤 죽은 사람을 묻은 것이 맞다”며 “지금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일 수 있지만, 당시에는 순장되는 것을 굉장히 영광스러운 행위로 여겼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꼭대기 고분을 지나 고분들 사잇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니 가야금 선율이 서서히 들리기 시작했다. 방문할 때마다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아니지만, 고분군을 찾은 단체 관광객이 있는 날에는 가야금 연주자가 한복을 차려입고 앉아서 가야금을 켠다고 했다.
현장학습으로 고분군을 찾은 초등학교 5학년 아이들은 연주를 들으며 서서 한참 연주자를 바라보고 지나갔다.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눈과 귀를 사로잡는 지산리 고분군이 아닐 수 없다.
1시간여 동안 한 트레킹의 끝에는 대가야박물관이 있다. 인근 지역 초등학생들이 단체로 역사를 공부하러 왔는지, 박물관 앞에 아이들의 목소리가 가득했다. 대가야시대와 고령 지역의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구석기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역사 문화, 대가야의 황금빛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가족 단위 여행객들이 고분군과 함께 관광하면 ‘역사 여행’ 코스가 완성된다.
대가야박물관의 휴관일은 매주 월요일이다. 3월부터 10월 여름철에는 오후 6시에, 11~2월 겨울철에는 오후 5시에 문을 닫는다. 박물관 티켓으로 순장 무덤의 내부를 재현해 놓은 대가야왕릉전시관과 우륵박물관까지 모두 관람할 수 있다.
대가야의 현악기 ‘가얏고’를 만나는 시간
주산 고분군에서 가야금 소리를 들은 뒤, 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우륵박물관에 도착했다. 우륵박물관 정면에 우리나라 3대 악성 우륵이 앉아 가야금을 켜고 있다.
우륵은 대가야 가실왕의 명을 받아 열두 달의 음률을 본떠 12현금으로 만든 가얏고(가야금)로 12곡을 지은 악사다. 박물관에 우륵의 생애는 물론이고 가야금의 기원, 전통 국악 현악기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들을 수 있도록 전시돼 있다. 그래서 현악기를 연주하는 외국인 연주자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우륵국악기연구원에 중요 무형문화재 제42호 악기장 김동환 명장이 머물며 가야금을 제작하고 있다고 했다. 명장을 만나기 위해 찾은 우륵박물관 뒤편에 가야금의 몸통이 될 나무들이 줄지어 자리 잡고 있었다.
김 명장은 “30년 이상 된 오동나무를 5년 동안 자연 건조한다”며 “충분히 건조하면 좋은 나무가 구분되고, 좋은 소리가 나는 것을 선별해 연주용 가야금으로 제작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5년 동안 건조하면 나무의 숨구멍이 열린다”며 “좋은 소리는 나무에서 북소리가 난다. 재료가 좋아야 좋은 소리가 난다”고 덧붙였다.
전문 연주자들의 가야금이 되기까지 200여 공정을 거친다. 이 공정에 명장은 1000번 이상 손을 대야 한다고 했다. 김 명장은 이렇게 대패로 다듬어진 나무에 인두 작업을 하는 과정을 직접 보여 줬다. 불에 달군 인두로 울림통(몸통)을 지져 자연 그대로의 색을 입히는 과정이다. 이후 열두 줄의 굵기에 맞게 안족 중앙 홈을 톱으로 판 뒤 현침은 장미나무로, 좌단은 소뼈와 장미나무로 장식한 뒤 명주실로 열두 줄 굵기를 각각 맞춰 감으면 하나의 가야금이 완성된다.
매년 5월에서 10월 사이에 가야금 가족 체험 프로그램이 진행, 가족 단위 60개 팀이 직접 가야금 제작과 연주를 체험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했다. 가야금 제작은 시간이 오래 걸려 가야금 연주를 체험해 보기로 했다. 체험은 우륵박물관 인근 가얏고마을에서 진행됐고, 전문 연주자가 선생님으로 기초부터 교육하고 있었다.
열두 줄 각각에서 나오는 계이름부터, 손으로 줄을 뜯는 방법, 소리의 울림을 만드는 비브라토 넣기 등 가야금을 켜는 법을 배우는 짧은 시간 동안 흥미가 붙었다. 정규 체험 기간은 3주 6회로, 이 기간 뒤에도 가야금을 배우는 이들이 많다는 후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