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오전 10시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진행된 고 신성일의 영결식과 발인식이 엄수됐다. 부인 엄앵란을 비롯한 가족들과 70여명의 영화계 인사들, 소식을 듣고 먼길까지 찾아온 팬들까지 많은 이들이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조사에 나선 지상학 한국영화인총연합회 회장은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를 다음과 같은 말로 바꾸고자 한다. 큰 별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육신의 죽음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고인은 한국영화계의 역사이자 전설로 남았다. 지 회장은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선배님의 이름을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이 없다. 선배님처럼 시대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대스타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라며 "당신이 있었기에 우리는 행복했다. 같은 시대에 살아 행운이었다. 한국영화 역사의 전설이었고 신화였다"고 이야기했다.
이어 오석근 영화진흥위원장은 "선생님은 한국 사회상의 표상이었다. '맨발의 청춘'의 댄디한 모습은 새로운 남성상이었다"라면서 "영화인으로서 후배들에게 힘이 돼주신 선생님. 영화만을 위해 살아가셨던 열정을 잊지 않겠다. 선생님께서 살아가신 영화를 치열하게 기억하겠다"며 고인을 추모했다.
영화인들을 대표한 두 사람의 말처럼 고인은 세상을 떠났지만 영원히 한국영화사에 남았다. 신성일이라는 배우를 빼놓고서는 한국영화사를 논할 수 없기에 그는 500편이 넘는 영화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이 됐다.
신성일은 지난 4일 새벽 전남의 한 병원에서 타계했다. 향년 81세. 지난해 6월 폐암 판정을 받은 후 항암 치료를 받아왔고, 결국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1937년 출생한 신성일은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스타이자 원조 미남 배우다. 1960년 신상옥 감독의 작품 '로맨스 빠빠'로 데뷔했고, 신상옥 감독으로부터 지금의 예명을 받아 본명 강신영이 아닌 신성일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64년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으로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당시 활동하던 배우들이 중후한 매력을 가졌던 것과는 다르게 신성일은 카리스마 있는 반항아 이미지로 사랑받았다. 청춘 스타로 자리매김한 후 '떠날 때는 말 없이'(1964), '불타는 청춘'(1966), '별들의 고향'(1974) 등 무수히 많은 히트작을 남겼다.
부산국제영화제와 한국영상자료원이 지난해 펴낸 책 '배우의 신화, 영원한 스타'에서 박찬욱 감독은 그에 대해 "이토록 한 사람에게 영화산업과 예술이 전적으로 의존한 나라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없었다"며 "신성일을 이해하지 않고는 한국영화사는 물론 한국 현대문화사 자체를 파악할 수 없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