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트에서 20년간 활약한 우리은행 임영희. 18일 열린 2018~2019 여자프로농구 플레이오프 3차전우리은행과 삼성생명의 경기는 임영희의 현역 마지막 경기가 됐다. WKBL 제공
이름 없는 식스맨으로 10년, 없어서는 안 될 주전이자 팀의 기둥으로 10년.
코트에서 꼬박 20년을 보낸 '임브론' 임영희(39·우리은행)의 선수 인생 전·후반 성적표는 흡사 다른 사람의 것처럼 판이하게 다르다. 그러나 그가 보낸 20년간의 선수 생활은 전·후반전 모두 여자 농구계에 깊은 울림을 주고 마무리됐다.
아산 우리은행은 지난 18일 아산 이순신체육관에서 열린 우리은행 2018~2019 여자 프로농구 플레이오프(3전 2선승제) 3차전에서 용인 삼성생명에 68-75로 패했다. 이날 패배로 시리즈 전적 1승2패가 된 우리은행은 2012~2013시즌부터 이어 온 챔피언결정전 6연패의 꿈을 접고, 플레이오프에서 탈락의 고배를 들게 됐다. 위성우 감독과 전주원 코치가 우리은행에 부임해 '우리왕조'를 세운 뒤 처음 겪은 일이다.
챔피언결정전 진출이 무산됐지만 우리은행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개운하다' '후련하다'는 자평이 뒤따랐다. 위 감독은 "이 자리에 너무 오래 있었다. 이보다 더 일찍 내려오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며 "(3차전까지 가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진을 빼게 돼 삼성생명에 미안하다"며 멋쩍은 미소를 짓기도 했다. 남들은 한 번도 하기 힘든 우승을 6번, 그것도 통합 우승을 연달아 달성한 팀만이 느낄 수 있는 부담감을 내려놓은 위 감독의 심정이 전해지는 말이었다.
우리은행 위성우 감독은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임영희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위 감독을 비롯한 우리은행 선수들이 아쉬움을 느끼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맏언니' 임영희의 현역 마지막 경기를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었던 욕심이다.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임영희는 이날 삼성생명전이 선수 생활에서 마지막 경기가 됐다. 위 감독은 경기 이후 기자회견에서 임영희의 이름을 입에 올리다가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오열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이 마흔 살이 먹도록 감독한테 욕먹으면서도 묵묵하게 뛰어 줬다. (임)영희를 생각하면 늘 미안하고 고맙다"며 "감독 인생에서 임영희라는 선수를 만나 고마울 뿐"이라고 그에 대한 진심을 전했다.
마산여고 시절 신정자와 함께 주목받았던 임영희는 1999년 광주 신세계에 입단했다. 그러나 입단 이후에는 주로 식스맨으로 뛰며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다가 2009~2010시즌 우리은행으로 이적한 뒤 전성기를 구가했다. 특히 위 감독-전 코치 체제로 시작한 2012~2013시즌부터 박혜진과 함께 '우리왕조'의 토대를 세우고 국가대표팀에서도 맹활약을 펼쳤다. 이 같은 활약 속에서 2012~2013시즌 정규 리그와 챔피언결정전 최우수선수(MVP)를 싹쓸이하며 여자 농구 최고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2013~2014시즌에는 챔피언결정전 MVP에 올랐다. 시즌 베스트5 포워드 부문에도 세 차례나 선정됐다.
여자 프로농구 사상, 그 누구도 달성한 적 없는 600경기 기록을 세울 정도로 근면 성실했다. 자기 관리의 화신이라고 평가받는 임영희는 선수들 사이에서도 '전설'이나 마찬가지였다. 상대팀이었던 박하나는 임영희의 은퇴 사실을 되새기며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신세계 시절 룸메이트였는데 언니가 해 준 '김치수제비'가 기억난다. (김)정은 언니와도 함께 뛰었던 추억이 있다"며 눈물을 보인 박하나는 "영희 언니는 우리은행을 이기기 위해선 반드시 넘어야 하는 존재였다. 경기가 끝난 뒤 언니가 '꼭 우승하라'고 해 줬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적장인 임근배 삼성생명 감독도 임영희에 대해 "프로 무대에서 40세가 될 때까지 최고 자리를 지킨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영희는 정말 대단한 선수"라며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코트에서 적으로 부딪혔던 김한별 역시 "임영희의 마지막 경기라는 사실이 많이 슬프다"며 "WKBL과 우리은행 그리고 국가대표팀에서도 큰 기여를 한 선수다. 우리은행이 6연패 하는 동안 많은 걸 해 왔는데, 그의 마지막 시즌에 챔피언결정전에 가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쉽다"고 임영희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그는 "대표팀에서도 나를 많이 도와줬다. 정말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위 감독은 이날 "다음 시즌을 잘 준비해서 임영희 없이도 강한 우리은행을 보여 주겠다"고 다짐했지만, 반쪽 같은 제자를 떠나보내는 마음은 헛헛하기 그지없었다. 농담 삼아 "전 코치처럼 아이를 낳고 코트로 돌아오면 되지 않냐"고 한탄할 정도다. 물론 위 감독이 순순히 임영희를 보내 줄 리 없다. 선수로 마지막 경기를 마무리한 임영희는 2019~2020시즌부터 우리은행 코칭스태프로 합류해 위 감독과 동행을 이어 갈 예정이다.